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번 칼럼에서는 예수님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한다.마태 2,1~12는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장면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제주도를 찾은 예멘 난민들을 두고 우리 사회가 소란스럽다. 한편의 사람들은 이들을 맞아들여 보호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들을 보호하는 데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난민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시 이를 위한 정부의 대책을 요청하고 있다. 난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입장은 인지상정의 발로이다. 그 해당자가 누구이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제적 규범이 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은 그 상식에 기초해 있다. 반면에 난
불교에서는 삼귀의 오계(三歸依 五戒)를 받아야 정식불자가 된다. 기독교에서의 세레와 같은 의식이다. 삼귀의는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불(佛)에 귀의함은 복혜(福慧)와 자비(慈悲)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며 법(法)에 귀의함은 광명(光明)과 생명(生命)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며 승(僧)에 귀의함은 청정(淸淨)과 평화(平和)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의 묵시록 21,1~8절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이와는 반대되는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변덕스러운 마음이 공존하던 곳이다. 이곳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로 인해 죽음, 슬픔과 울부짖음, 그리고 괴로움이 있는 곳이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인간의 나약함과 죄
"네가 만일 그르다 하면 저도 또한 너를 그르다 할 것이니 중도를 취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괴로움이다."(잡아함경) 부처님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도를 취함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다툼과 원망이 쌓여 서로 괴로움을 만들어 가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며 살아 왔다. 우리는 그 진의를 알았다면 지금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난 보다 좋은 생활의 장을 만드는데 노력해야 당연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며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로마 6,1~14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세례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세례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받은 이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어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
얼마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남북정상회담 장면은 TV를 통해 생중계 됐고, 이를 본 많은 국민들이 가슴 뭉클해 했을 것이다. 세계 유일하게 남은 휴전상태인 나라의 수장들이 만나 서로 악수를 하고 판문점선언을 통해 비핵화에 동의한 것은 휴전을 끝내고 전쟁을 종식하자는 뜻을 밝힌 것으로, 우리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환호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었다. 이어 앞으로 진행될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초기경전 아함경 가운데 샤카족과 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 공동체에 나타나신 사건에 대한 기록인 요한 20,19~23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주간 첫 날 저녁은 유다인들이 안식일이 끝나고 활동을 시작하는 때이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받쳐 따랐던 스승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스승과 같은 운명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모두 잠가 논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특정한 민족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은 분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세상의 우두머리를(요
일체 존재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해 항구불변(恒久不變)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불교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無常變異)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主)해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하는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불교의 삼법인설(三法印說)을 보면 재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무상 속에
탈출 14,15~31절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모세는 하느님께 부르짖는다. 하느님께 부르짖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믿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사 백 여 년간의 노예 생활을 했다. 이 노예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에서 들어난 그분의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였다. 세계 최고의 군대를 가진 이집트에서 많은 재물까지 들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아직도 그
남에게 무엇인가를 베푼다는 의미에서는 공양(供養)과 보시(布施)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공양은 나보다 훌륭한 분께 무엇인가를 올린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보시는 상대방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베풀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그 베풂의 내용이 물질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에 따라 둘로 구분된다. 즉 물질적인 보시를 재시(財施)라 하고, 정신적인 보시를 법시(法施)라고 한다. 공양도 보시와 마찬가지로 재공(財供)과 법공(法供) 둘로 구분된다. 여기서는 주로 재공의 의미로 사용한다.
창세 22,1-9절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받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하신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창세 12-22장)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탈출 15,25; 1테살 2,4) 아브라함의 인생이 그랬듯 우리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길, 진리, 생명이신 하느님의 우
얼마 전 상영된 영화 가운데 14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화제가 된 '신과 함께' 라는 영화가 있다. 사람이 죽어서 중음(中陰)의 세계를 거치면서 살았을 때의 일에 대하여 재판 받는 내용의 영화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업(業)을 짓게 되는데, 두 가지로 구별되는 삼업(三業)이 있다. 첫째는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의 삼업이고 둘째는 그 행위의 좋음에 따라 선업(善業), 나쁨에 따라 악업(惡業), 좋음과 나쁨에도 속하지 않는 무기업(無記業)의 삼업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신
이번 칼럼에서는 부활 전야 미사 때 읽게 되는 구원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자 한다. 성경 말씀 안에서 가장 큰 위로와 힘을 받는 나의 묵상을 통해 누군가 위로와 힘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첫 번째 묵상 나눔을 시작한다.성경의 첫 책 창세기는 한 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야기로 시작된다. 창세기는 창조되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꼴을 갖추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인연화합과 상호관계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연기(緣起)를 설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어져 간다. 요즘 tv를 보면 부모와 자식 간의 폭행, 데이트 폭행 등 심각한 폭력사건이 방송되고 있다. 서로 사랑해도 모자랄 관계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은 폭력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거나 자살로 이어 지는 더욱더 심각한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 화는 왜 나는 것일까? 불교의 가
몇 개월 전에 칼럼 부탁을 받고 가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있었다. 장자(莊子) 천도편(天道篇)의 '윤편'(輪扁)의 이야기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묻는다. "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인(聖人)의 말씀이니라." "그 성인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糟魄, 조백)입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윤편에게 합당한 설명을 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
어느 덧 2017년 마지막 달이다. 이때 가장 많이 하는 말, 듣는 말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를 잘 마무리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자'는 말이다. 연말이면 의례적으로 하는 이 표현이 가슴으로 와 닿음을 느끼는 사람은 그만큼 나이와 경험을 먹었다는 얘기다. 또한 새해를 맞이하며 굳은 각오로 세웠던 모든 계획들이 생각대로 이루지 못했음을 매번 겪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계획했는데 이뤄내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지난 한해를 후회하기도 하고, 내년엔 절대로 그러지 말자 다짐
엄마는 아이를 다시 한 번 차가운 땅 속으로 홀로 내려 보내야 했다. 사람들은 5년 전 사고로 잃은 하나뿐인 아들을 긴 재판에서 이겨 결국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무덤 축복을 하는 내내 엄마는 울었다.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어렵게 경문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저 어머니에게 아들을 잃었던 그 날 그 시간이 지금 현재 일처럼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의 일처럼 마음속에 간직되고 있는 일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히말라야의 고산지대 속에 숨어 있는 은둔의 왕국 부탄은 대한민국 면적의 3분의 1, 인구 75만 명인 소국이요, 세계적인 빈곤국이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하다는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밖에 되지 않는 나라임에도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나라에서 대학과 유학까지 보내준다. 병원비도 무료다. 노숙자도 없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4대 국왕이 발안한 GNH(국민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개념에 의거해 무상의료제도가 시작된 덕
가끔 TV를 보다가 눈물이 날 때가 있다. TV 속 어떤 내용이 내 안의 어떤 것과 공명(共鳴)을 하고, 공감(共感)을 하게 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미사를 집전하다가, 특히 강론을 하다가 눈물이 나기도 한다. 말씀이 내 안의 어떤 것과 공명을 하고, 말씀을 하시는 분과 내가 공감을 하게 되면, 눈물이 나는 것이다. 공명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해주며, 너와 나의 장벽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높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을 없애준다.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명하며 사셨음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