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익숙하고 편하지만, 인천공항에 착륙해서 시동을 끌 때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 전에 나는 나만의 루틴을 준비한다. 승객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들이다.첫 번째, 착륙 한 시간 전에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반드시 다녀온다. 언젠가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착륙하려고 강하를 시작한 시점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었다. 20분 정도면 착륙할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그날따라 비행기가 많아서 예상보다 많이 지연됐다. 가까스로 망신스러운 일
조종사에게 비행은 너무나도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조종사 가족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걱정이 숨어 있다. 내가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께서는 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아니더라도, 비행기 사고가 나면 꼭 전화하셔서 나의 안전을 확인하신다.나의 아내도 비슷하다. 내색을 안 했을 뿐, 지난 30년 동안 몇 번이나 놀랐다고 한다. 언젠가는 화물기로 아침에 돌아오는 비행이었는데, 중간 기착지에서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도착이 많이 지연됐다. 정비하는 동안 나는 비행기 안에서 대
항공기 출발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조종실은 바빠진다. 연료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관제탑에 비행 허가를 요청하느라 분주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조종실 창문 너머 탑승구로 눈길을 돌린다. 신혼부부가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걸어오는 모습, 연세가 지긋하신 노부부의 미소 그리고 학교를 벗어난 해방감에 살짝 흥분한 아이들의 장난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지금까지 내가 모신 승객은 몇 분이나 될까? 매 비행마다 승객 수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으니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비행당 250분을 모시고 월 6회 비행한 것으로
서울은 오후 7시지만 여기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새벽이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았지만, 배꼽시계는 밥 먹을 시간이라고 아우성이다.새벽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인적이 뜸하다. 어두운 거리에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아래 몇몇 노숙자가 보일 뿐이다. 이 시간 허기를 채우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가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세상 물정 모르던 국제선 부기장 시절, 새벽녘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맨해튼 한국 거리를 나선 적이 있었다. 24시간 영업하는 한국식당에서 맛있는 설렁탕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뿌듯해하며 호텔로
나이로비의 아침 햇살이 오렌지색 커튼 사이로 비칠 때, 어쩐지 내 몸은 한밤중인 듯 무겁고 콧물이 줄줄 흘렀다. 어젯밤 나이로비 국제공항으로 접근을 시작할 때 오한이 느껴졌는데, 밤새 컨디션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내 마음속에서 두 친구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흔치 않지만, 비행할 때 비염은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하기도 하지. 몇 년 전 신 기장이 비행 중에 비강이 막혀서 고생하다가 결국 연료를 방출하고 회항했던 거 기억나지? 조종사가 아프면 안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지금 회사에 전화하면 어떨까?
`따르릉…. 엔진 파이어!`예기치 못한 경고음이다.부기장: 기장님, 오른쪽 엔진에 불이 났습니다.기장: 이륙을 중단합니다.기장: 스로틀(액셀러레이터) 줄이고, 오토 스로틀 수동, 스피드 브레이크, 리버스기장은 엔진에 불이 났을 때의 절차를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최대 속력으로 달리려던 비행기는 속도가 줄어들면서 좌우로 부르르 떨며 몸부림친다. 지금부터 부기장은 기장이 하는 모든 일을 더 철저히 모니터한다.부기장: 기장님, 스피드 브레이크 나왔습니다. 역추진장치, 속도 60kt(시속 100㎞) 입니다.기장: 리버스 아이들(최소), 오토
관제사님, 가나다 항공입니다. 활주로로 이동 허가해주세요.가나다 항공, 대기하세요. 이륙 순서 38번입니다.옆에 있는 왓슨 부기장과 눈이 마주쳤다. 장대비 사이로 쉬지 않고 떨어지는 벼락을 바라보며 이번 비행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37대가 이륙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현재 비행기에 실린 추가 연료로는 지상에서 두 시간 정도 대기할 수 있을 뿐이다.얼마나 기다렸을까 관제사로부터 활주로로 이동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활주로로 연결되는 유도로는 이미 눈 내린 금요일 저녁 올림픽대로처럼 밀렸다.나와 왓슨, 그리고 함께 비행하
"친구야, 잘 지내지?"전화기 너머로 친한 고등학교 동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들 진로 문제로 상의 좀 하려고 그래. 우리 아들이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도통 안 해서 조종사나 시킬까 하는데….""그래? 그럼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나?""이제부터는 열심히 하겠다고 하네. 그런데 조종사가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나?""친구야, 나도 이 나이까지 공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조종사가 공부할 게 그렇게 많아?"조종사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비행 훈련을 시작하면 단기간에 학습해야 할 내용이 많다. 항
"공군사관학교 출신이시군요?""아닙니다. 저는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그럼 항공대 출신이시군요?""아닙니다. 저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습니다."항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조종사가 됐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공군사관학교나 항공대학교를 나와야 조종사가 되는 줄 알고 있었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조종사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내가 조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항공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한 199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88 서울 올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비행기도 진화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자동조종장치는 조종사를 대신해서 짙은 안개 속에서도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 자동화된 시스템이 조종사를 대신하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비행기는 조종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조종사의 책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겁다.조종사는 이륙할 때 제일 바쁘다. 비행기마다 다르지만, B777은 시속 300㎞ 이상으로 달려야 이륙이 가능하다. 고속으로 이륙할 때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종사는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출
Melbourne Center, E460, Maintaining FL 350(멜버른 관제소, E 항공 460편입니다. 고도 3만 5000피트입니다)E460, Melbourne Center, Roger. Identified. Maintain CPDLC(E 항공 460편, 멜버른 관제소입니다. 위치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CPDLC로 교신합니다)관제사와 교신을 마치고 나니 저 아래 애들레이드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훈련을 받았던 곳이라 그런지 애들레이드는 고향처럼 느껴진다. 전봇대처럼 삐죽 솟아오른 애들레이드 항구 굴뚝은 대전역처럼 익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