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고 소리를 들으려면 귀가 있어야 돼. 그런데 시간을 느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그래, 그건 마음이야 마음이란 것이 없어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이것은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이 인생의 시계가 꼭 한 번의 태엽이 감겨있으므로, 동일한 순간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 없음도 느끼고 있다. 이제 2020년 경자(庚子)년은 시간 안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참으로 어려웠던 한 해를 경건하게 마무리하는 이
사람에게 계절을 택해 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봄과 가을만 택해 살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솟아날 생명력을 준비하기에, 황폐의 기간이 아닌 대기의 기간인 것이니, 새벽이 오기 전의 암흑이고, 심산(深山)의 험로(險路)일 뿐이다.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는 숲을 더욱 무성하게 하고 대기를 정화하며, 풍요로운 결실을 준비해 새 창조의 문을 연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추위와 더위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고, 다양한 고통들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는 것이다. 이 고통들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운명에 맡기는 이도 있고, 고통을 정면으로 대항해 극복하고자
심리학자 '듀에인 슐츠(Duane Schultz)'는 "인격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나를 넘어서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산다"고 말했다.인격을 라틴어에서 '뻬르소나(Person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가장무도회에서 사용하던 가면(假面)에서 나왔다. 숱한 본성을 지닌 내면과 달리,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잘 정돈된 자아의 모습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절제된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 대면할 때 그 사람의 성숙한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대면에서는 아무도 다른 이의 가면을 벗기지 않는다는 약속이 돼 있다.사람의 진실한 면모
가톨릭교회의 기도문에 '고백의 기도'가 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한 것들과 의무를 소홀히 한 것들이 자기 탓이라고 고백하며, 탓이라는 말이 나올 때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기도다. 내면세계의 문을 열어젖히고, 삶에서 물든 죄책들을 선으로 이끌지 못한 자신을 참회하며, 절대 선 자체이신 신에게 귀의하겠다는 의미로 가슴을 치는 것이다. 그때 내심의 양심이 되살아나 세상의 잘못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 의식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근래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탓의 보편화가 정치를 비롯해 각계각층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
교회법이라는 용어를 '까논(Canon)'이라 부른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카논(kanon)에서 나왔는데, 카논은 규칙 또는 규범을 의미한다. 본래 목수가 선을 긋는 도구인 먹통을 의미하며, 먹줄을 긋고 그 기준선으로 나무를 깎은 데서 유래됐다. 최근 우리나라는 법의 운용을 놓고 열병을 앓고 있다. 법의 기준이 대부분 '사회적 합의'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여론과 권력의 힘으로 합의해 새 기준을 만들어 운용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사회적인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비도덕적인 기준이 형성될 수 있다고 했다. 법
젊은이가 한 가정을 이룰 시기가 되면 두 가지 은혜로움이 주어진다. 여성에게는 아름다움이, 남성에게는 아내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이 은혜로움은 남녀가 서로 이끌리도록 주어진 창조주의 섭리다.한 부부가 탄생이 되면, 사랑의 결실로 생명을 잉태할 준비를 한다. 부부는 한 생명의 보호자로 불림을 받아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한다. 희생만큼 사랑에 휘황한 모습을 주며 새로운 경지로 비상시켜주는 것이 또 있을까?부인이 임신하면 세 가지 덧을 한다고 한다. 그 하나가 입덧인데, 평소 좋아하던 음식이 당기지 않고, 평소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이성(理性)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임을 자각하고, 인생의 고귀한 가치관을 담지(擔持)해 목적지를 향한 방향을 설정하며 살아간다.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걷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도 없다. 사람들의 걷는 그 행위에는 늘 어느 목적지가 있게 마련이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에 살아간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표현은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사람 인(人)을 사람이 걷는 옆모습의 형상에서 나왔다고 한다.짐승을 보고 살아간다고 하지는 않는다. 짐승은 살아있는 것이다. 왜냐
더운 날씨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개의 퀴즈를 풀어보자. 첫째 퀴즈는 격투기 경기 승자를 맞추는 문제이다. 같은 체급의 두 선수 A와 B가 있다. A 선수는 손을 뒤로 묶고, B 선수는 눈을 가린 채 경기를 진행하면 누가 이길까? 둘째 퀴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상대는 누구일까?'이다.첫째 퀴즈의 정답은 눈을 가린 B 선수이다. 발을 사용할 수 있는 격투기 경기라면 당연히 손이 뒤로 묶인 A 선수가 이길 텐데, 왜 그럴까? 이유는 '보이는 게 없으니까'이다. 둘째 퀴즈의 정답은 보이지 않게 하는 투명망
라틴어로 된 'Si vales bene est, ego valeo.'(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라는 문장은 "당신이 잘 계시다면 좋네요, 저도 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첫인사나 끝인사로 흔히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종이가 아주 귀했기에 이 문장의 첫 단어만 약어로 'S.V.B.E.E.V.' 표시하기도 했다. 오늘의 나도 같은 말로 안부를 여쭙고 싶다. "여러분 모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내고 계시다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저도 잘 지냅니다."예상치 못한 불청객 '코로나1
코로나(왕관)는 지배의 상징이다. 화려한 왕관을 쓴 바이러스가 지구공동체를 일시에 무릎 꿇렸다.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못했던 일이다. 미국 대통령에서 아마존 밀림의 어린이까지 전 인류공동체가 동시에 공포와 허무에 떨고 있다. 모든 제도와 산업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심연을 예측하기조차 힘든 어두운 그림자가 코로나 이후 시대에 드리워 있다. 로드맵을 그려본다. 이번 사태의 최대 난제는 익숙한 경험이 전개되는 낯선 환경에서 비롯된다.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위기 앞에서 낯섬과 배신감으로 돌변했다. 암도 정복한 듯했던 의료기술, 국경을
한국천주교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체가 드리는 미사를 중단했다. 박해와 전쟁 중에도 순교를 각오하고 미사를 봉헌했는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총칼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나와 함께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공동체미사는 중단했지만, 힘든 세상을 위해 매일 개인미사를 드리면서 나름 밥값을 하려 노력중이다. 돌아보면, 2011년 일본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가 있을 때 우상숭배와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린 '신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2020년 1월 이후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는 시간과 공간을 살
2018년 필리핀 대통령인 두테르테는 '국가 과학기술 주간' 개막식에서 많은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연설을 했다. "누구든지 신과 찍은 셀카를 보여줌으로써 신이 있음을 그에게 증명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 할 것이다"라는 도발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성경의 신을 '어리석다'고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말에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느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신이 있으면 보여 달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직접 보거나 증명해 보일 수 없다면 '정말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져 본다. 인간에게는 5가지의 감각 곧 시각, 청각
새해를 맞으며 여러 덕담을 나누지만 실제의 삶은 만만치 않다. 계획대로 잘 풀리는 일은 거의 없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괴로운 일과 사람에 시달리며 산다. 이렇게 겪는 악과 고통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나 종교가 과연 있을까? 그래서인지 많은 종교도 고통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신이 없다는 쪽이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는 입장이라면 대답은 복잡해진다. 선한 신과 현실의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힘든 삶을 사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그리스도교 입장으로
"목표를 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를 쓴 미국의 심리학자 토니로빈스의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고, 바쁩니다. 때론 그 바쁨이 인간관계의 형성에도 방해가 됩니다. 그런데도 무엇이 중요한지 매우 바쁩니다. 그 사람을 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났습니다. 똑같습니다. 역시 바쁩니다. 시간에 쫓기고, 허덕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뭐가 잘 안 풀리는지 얼굴이 전보다 더 어둡습니다. 그 사람과 우연히 마주 앉아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
살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노소를 떠나 누구나 다 그렇다. 욕심이 사고가 되는 것도, 화가 사고로 이어지는 것도, 어리석음이 화로 이어지는 것도 모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닦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들이다.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한 가지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만족'이라는 즐거움이다.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라.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항상 웃고 있고 여유가 넘쳐흐른다. 그것은 그 사람이 실제 상황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뛰어 넘어 만족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즐
밤을 또 다른 말로 율자(栗子)라고도 한다. 밤이라는 말도 매력 있지만 밤나무의 아들(율자)이라는 표현도 참 매력 있다. 밤은 주로 중부·남부지방에 많이 나며, 8월 말에서 10월 중순경에 완전히 영근다. 밤은 비타민이 풍부하고,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서 건강식품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런 밤을 감싸고 있는 밤송이는 율방(栗房)이라고도 한다.사전에서는 '밤알을 싸고 있는 두꺼운 겉껍데기. 가시가 돋쳐 있고 밤이 여물면 네 갈래로 벌어져 밤알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정도의 설명으로는 밤송이의 역할이 제대로 설명
그 바람을 성취시키는 데는 기도가 있어야 하며, 기도는 볼록 돋보기와 같아 햇빛을 하나로 모아 목적했던 종이 태우기를 성공하는 것처럼 바람을 성취하게 한다. 그렇다면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궁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기도는 물질적 측면에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유한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기도이다. 정신적 측면에서도 두 가지 종류의 기도가 있다. 하나는 정성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적 기도(허영)이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의 경험이 있을 것이고, 특별히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종교적 대상에
감사는 교양의 열매이며 신앙의 근본이다. 교양이 감사로 귀결되지 않으면 반드시 부패가 일어나 악취를 풍기게 된다. 믿음 생활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람에 대한 감사를 배제하면 가짜 종교로 추락할 뿐이다.우리의 아픔은 경제지수와 감사지수가 비례하지 않는 데 있다. 생활이 나아진다고 감사가 풍성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 풍요로움이 영혼을 압박해 원망과 불평, 탄식을 낳는 현상을 본다. 우리나라는 소위 압축 성장을 통해 생활의 성장은 경험했으나 인격의 성숙까지 도모했는지 심각하게 물어야 하리라. 왜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를 가리켜
오늘도 아침에 내게 좋은 글이 도착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독자분들에게도 모두 도착했을 것이다. 누가 보내는가는 관계없다. 누군가 만들어내고 누군가는 그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때로는 흘러간 분위기 좋은 음악도 함께 곁들여서 오기도 한다.그 말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다. 그 내용 대로만 생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정이 차고 넘칠 정도이고, 이상향을 향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퍼 나르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글을 읽기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 같
애향심(愛鄕心)은 자신도 살리고 고향도 살린다. 지방색(地方色)은 자신도 나라도 망하게 한다. 필자는 경북 의성에서 출생했다. 육쪽마늘과 사과로 이름 있는 곳이다. 그런데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영미야~'로 유명한 컬링의 본산이 되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세계 속의 항구 부산에 살다가 대학 진학을 서울로 했다. 서울에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가 미국에 유학 가서 살기도 했다. 그리고 대전의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초청받아 현재 25년 째 일하고 있다. 과연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이 글로벌 시대에 고향을 운운하는 것이 과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