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基督敎)와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같은 의미이다. 과거에는 야소교(耶蘇敎)라고도 했다. 예수교의 한자식 표현이다. 예수는 사람의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직책이다. 그리스도(Christ)는 영어 표기이며 그리스어에서 왔다. 동일한 의미의 메시아(Messiah)는 구원자의 의미로 히브리어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쟁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의미가 깔려있기도 하다. '쟁이'라고 하는 말은 '장이'의 격을 낮추어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예수장이'
오늘은 일요일. 일요법회가 있는 날이라서 난 설법 준비에 바쁘다. 내가 불교의 중요한 행사일에만 법회를 하지 않고 굳이 매주 일요법회를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말씀을 더 자주 듣고, 그것을 평소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바람에 따른 것이다.절기로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이른 봄인 까닭에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암사에는 많은 신도님들이 오신다. 모두 반가운 얼굴이라서 뵙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이처럼 많은 신도님들이 절에 와서 법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사연이야 모두 다르겠지만 결국은
지금처럼 목사상이 혼란스러운 때가 없는 것 같다. 목사는 과연 누구인가? 목사(牧師)를 가리켜 "목사는 황제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노숙자의 동료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정의는 "멘탈이 강한 사람" "선한 목자" "변신의 귀재"로 인식된다. 멘탈이 강해야 한다는 의미는 사명자로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변신의 귀재라 불리는 이유는 변질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다. 때로는 세상에 욕먹는 목사도 적지 않지만 주야장천(晝夜長川) 오직 양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간과 쓸개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한길로 달려가는 사람으로
불교를 믿는 많은 사람이 해탈을 원한다. 해탈이란 단어는 열반이라는 단어와 함께 불교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만일 그 의미를 안다면 불교도들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가 원하는 마음 상태일 것이다.해탈이란 무슨 의미일까?해탈이란 마음에 걸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남으로써 마음이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맺힌 것을 풀어야 한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통의 우리는 맺힌 것을 풀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풀기보다는 점점 더 옭아매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우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듯 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유관순'의 노랫말이다.3·1절 100주년을 맞은 때에 국가 유공자 3등급에서 1등급에 추서된 유관순 열사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열사는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유언을 남겼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세상은 바야흐로 지식과 정보의 시대다. 지식이나 정보가 있어야만 그것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그로부터 창출된 부가가치, 즉 돈이 있어야만 생활의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지금은 매스미디어의 시대다. 점점 더 다양한 정보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온다. 예전에는 정보전달 매체가 교과서나 책, 신문 정도로 제한돼 있었으며, 그나마도 접근하기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행 주기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TV, 스마트폰 등과 같은 첨단화된 정보전달 매체가 확장되고, 정보 갱신 속도가 거의 실시간으
많은 분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여기에는 나와 가족, 때로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행복을 이루기 위한 소중한 목표들이 많이 포함돼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분들의 목표가 성공하지 못하고, 써 내려가다 멈춘 플래너와 함께 스러져가는 것을 적지 않게 경험하고는 한다.왜 그럴까? 목표 달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견고한 마음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목표를 성공시키려면 그에 맞추어 마음을 결연히 하는 실천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이 빠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사소한 조건과 나의 욕구가 결탁해 아주 쉽게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권력의지를 잘 다루지 못하면 그 자신과 이웃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게 된다. 모두가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오를 수도 없거니와, 설령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할지라도 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끝없는 갈등과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의지를 승화시켜 봉사의지로 전환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우리는 오랫동안 출세에 대해 자극을 받아왔다. 곧 입신양명에 대한 원초적 갈망을 부모세대에서 자식세대로 대물림해 왔다. 우리가 아는 대로 입신양명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모은 효경에 나오는 '신체
"우리 아들은 갔지만, 다른 이들은 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지난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노동자 김용균씨 어머니의 절규이다. 그 죽음으로 노동 현장의 열악한 환경이 재삼 문제시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처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2년 전 구의역 김 군의 죽음으로 산업재해에 관한 사회적 여론이 환기되었을 뿐 산업재해를 막기 위한 법과 제도는 미뤄져 왔다. 그러는 사이 김용균씨의 죽음이 이어졌다.한국사회에서 산업재해의 심각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년 세월호의 희생자의 여섯 배가 넘
예수님의 강생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이 세상 창조 때부터 강생해 오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때까지 강생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동참이 바로 내 삶 안에서의 강생이다.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탁 안에서 나 자신을 파괴하고, 헛되게 하고, 의미가 없어지게(강생) 해야 한다. 내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셔야(갈라 2,20) 내 나라가 아닌 하느님 나라가 내 안과 이 세상에 건설이 된다. 하느님 나라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강생을 통해서 건설된다. 강생이 없는 모든 활동들은 술 찌꺼
한일간 국가적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지난 주간 일본을 다녀왔다. 교토지역 교회들과의 교류 2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위해서였다. 그 의미에 걸맞게 한일간 평화적 교류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는 일정으로 꽉 차 있었다.고대의 유적들을 들러보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긴밀한 문화적 교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길목을 함께 걷고 그 기억을 되새기는 것 또한 의미 깊었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적 교류에 대해서는 익히 아는 터, 그 의의에 더하여 그것이 세계역사에서 드물게 200년 넘게 인접한 국가끼리 전쟁 없
하느님의 구원 활동의 요약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삶 자체를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삶이 복음인 이유는 그분의 삶이 나와 나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성공과 실패,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데 익숙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구분에 대해서 거부하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신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구분하다, 분리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이들은 의인과 죄인,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은 유럽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반박문은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판매하자 그 부당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을 금전으로 환산하여 부를 축적한 교회의 타락에 대한 저항이었다.애초 그렇게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촉발되었지만, 그로부터 이어진 일련의 개혁 과정에서 교회 자체와 당시 유럽사회를 변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중요한 신학적 입장들이 확립되었다. 교회에 의한 세속사회의 지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신학 사상 중 하나다. 이사야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과 길을 알 때 그분의 활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 하느님의 적대자가 아닌 협조자가 될 수 있고,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다. 하느님의 활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말씀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신문은 말씀이 구현되어야 할 삶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삶의 현실은 비단 수동적 의미에서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진실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게 중요성을 지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낮 열 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여 있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어떤 이들은 ‘침묵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역설적인 어둠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 오직 대사제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
올해 초 충남인권조례가 폐지되었을 때 착잡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보편적인 인권의 규범을 따라 실생활의 영역에서 인권을 지키고자 한 조례가 의회의 다수를 점한 정당의 주도로 폐지되는데 이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우선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웠다. 더더욱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충남인권조례의 폐지가 일부 기독교인들의 질긴 요구에 따른 결과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다는데 어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고, 또한 기독교 내부에서도 건전한 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별 볼일 없는 작은 마을에서 오신 이 분은 세례자 요한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요한 1,15),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분(마르 1,7)이시다. 죄인 중에 하나로 인간의 모든 죄가 녹아든 물로 들어가신 분께서는 죄인 중에 하나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마르코는 이렇게 전한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땅 위에서 삶을 살았던 예수를 통해 신을 인식한 신앙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이 사람들 가운데 한 인간으로 현존하였다면, 그렇게 현존하였던 예수가 떠난 다음 하느님은 또 어떻게 현존하는가 하는 물음에서 영으로 현존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른 것이다.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이미 시사하듯, 삼위일체론은 신의 본질을 규명하는 교리라기보다는 신의 경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번 칼럼에서는 예수님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한다.마태 2,1~12는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장면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