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웠던 2020년 한 해를 보내고 2021년 신축년(辛丑年) 흰소띠 해가 밝았다. 소는 인내, 신의, 정직, 근면을 상징하는데, 특히 흰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재물과 명예가 따른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네 사정을 생각하면, 새해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제발 그리되길 간절히 소망한다.문제는 지난달 교수신문이 해마다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에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선정됐다는 점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뜻이다. 2위에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하다는 '후안무치'가 선
지난 시간에는 뉴에이지 운동과 음악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다. 20세기에 시작된 뉴에이지 운동은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1891)라는 한 신들린 여성으로부터 시작됐고 그것이 오늘날도 활동하고 있는 신지학(Theosophy)활동으로 연결됐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종교에 영향을 받은 음악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인데, 이 음악은 하나의 명상음악으로서 뉴에이지적 영성을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일종의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도록 음악에 많은 반복을 사용하는데, 음악의 반복
노래는 힘이 세다. 희로애락, 인생의 어느 굽이에서도 함께한다. 성취하면 어깨 걸고 합창하고, 스트레스 풀러 노래방을 찾고, 새벽녘에 따라 부르며 눈물짓다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는 한다. 그리하여 노래에는 사연이 스미고, 감정이 담기며, 끝내 삶 자체가 된다. 이런 힘이 있으니, 방송 시장에서 음악 콘텐츠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도 흐름이 있는데, 이는 시대와 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다. 여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그러하듯.한국 음악 오디션의 앞자리에 놓이는 프로그램은 단연 이다. 하지만 독보적인 역사를 가지는
SF소설 어슐러 르 권의 '빼앗긴 자들'에는 우리가 현재 '지구'라고 부르는 행성인 '테라'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세계, 나의 지구는 폐허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망가뜨린 행성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싸워댔고 죽였어요. 우리 자신을 파괴한 겁니다… 우리 행성은 불협화음입니다… 우리 테라인들은 사막을 만들었어요." 테라(지구)의 역사는 끝을 모르는 탐욕으로 균형을 잃어 사막으로 남아 있다고 보고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현대 세계의 미래가 탐욕으로 인한 것임을 '빼앗긴 자들
어릴 때 살았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끔 낡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불편한 몸으로 대문 앞에 서 있곤 하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언제나 오그라진 오른쪽 손은 옆구리에 붙인 채 다른 한 손에 든 바가지에 찬밥을 얻어가는 분이었다. 돌아설 때마다 어눌한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아주머니가 한쪽 발을 끌면서 동네 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아프곤 했다. 어느 날부터 엄마 모르게 아주머니에게 드릴 밥을 따로 놔두었다가 내드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치는 것도 같았다. 풍이 오기 전
한 때 "뉴에이지"라는 말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은 그 단어가 주는 의미를 정확히 모른 채 무분별하게 사용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음악"이 대표적인 예인데, 지금도 기억하지만 당시 서울 강남에 있던 "타워레코드" 매장에 가면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CD 코너가 가요, 팝, 클래식 등등과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시 뉴에이지 음악이라는 장르가 과연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그 음악의 특성을 대변하는 용어라기
뉴노멀(New Normal), 즉 새로운 표준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겠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변화가 집중된다. 현재까지 감염을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리두기인데, 이는 관계의 변형을 전제한 방법이기 때문이다.물론 관계 맺기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관계 유지 활동 중 상당수는 온라인으로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거세다. 먼저 약한 고리부터 끊겼다. 의무적 교류나 애착 없는 친목이 정리되었다. 축하와 애도는 계좌이체로 해결했고, 어색하게 술잔만 주고받는 모임은 현저히 줄었다. 다음으로 비
공공 미술은 '예술을 통해 시민의 미적 소양을 고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간창조'라는 비전을 가지고 전개된다. 그러나 실제 구현된 공공 미술 작품은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가치충돌을 겪어 왔다. 포스코사옥 앞의 프랭크스텔라의 작품 '아마벨'이 대표적이다. 비평가들은 '인간 문명의 방향성에 대한 비판적 발의를 담은 수작'으로 평가했지만, 대중은 그저 '고철덩어리'로 보았고 엄청난 비난을 견뎌야 했다. 공공 미술에 대한 논의는 공공과 시민, 일상에 대한 보다 새로운 가치지향으로 미술에 영역에서 재정의돼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공공 미술에
가끔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을 생각한다. 영리한 학동들 가운데 어리바리하고 더뎌서 공부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던 황상이 스승 앞에서 안타까워할 때 다산은 나무라지 않고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스승은 자신 없어 하는 제자에게 넌지시 배우는 사람이 경계할 일을 일러준다. 민첩하게 금세 외우나 제 머리를 믿고 소홀히 하는 경우, 예리해서 문제의 핵심을 바로 파악하나 재주를 못 이겨 들뜨는 경우, 대번에 깨달으나 투철하지 못해 대충하다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문제라는 것이다. 다산은 거기에 덧붙여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지난 칼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음악의 한 갈래이며 뿌리인 블루스(Blues)는 미국 흑은 노예들의 기독교 음악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비단 블루스뿐만 아니라 많은 음악들이 크건 작건 종교와 연관돼있다. 우선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 불리는 특히 18세기 서유럽에서 꽃을 피운 이 음악은 기독교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유럽에는 세기말적 시대정신이 짙게 드리운다. 그도 그럴 것이 영원할 것 같은 로마제국의 몰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그것은 세계의 종말 같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변화의 시기가 다가왔다고. 하지만 엄격하게 살피면, 인류 역사에서 변화가 진행되지 않은 시절이 있었던가. 어떤 식으로든 도전은 계속되었고, 그를 극복하려는 응전도 거듭되었다. 일상이란 언제나 고단한 쟁투 끝에 얻어낸 잠깐의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선언이야 빈번했지만, 이미 발표된 아이디어를 증폭시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변화를 앞세우는 주장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차근차근 따져봐야 한다. 그중에서 상당수는 호들갑에 불과하니.물론 변화가 체감되는 시기도 분명히 있다. 바로 지금처럼. 기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는 정보전달 매체를 뜻하는 미디어(Media)와 건물 외벽(전면)을 뜻하는 파사드(Facade)가 합성된 용어다. 주로 도시에 있는 빌딩을 비롯해 다양한 구조물의 면(面) 혹은 입체적인 구조물에 LED를 부착하거나 프로젝트를 이용해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건축 및 도시공간을 디지털미디어 표현의 디스플레이로 활용해 예술적 영상미를 제공하는 미디어파사드는 공공예술, 도시디자인, 아트 마케팅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된다. 지난 4월 코엑스 아티움 옥외광고판 건물에 설치된 'WAVE'
코로나로 힘겨운 시간 중에도 어느새 가을은 깊어간다. 상강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돈다. 정중동이라고 사회적, 심리적 거리만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도 문학인들의 창작열은 오히려 더욱 뜨겁게 지펴지는 듯하다.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문학의 속성이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다.가끔 시를 창작하고 싶어 하는 문학 지망생들이 소재의 빈곤에 대해 고민을 토로할 때가 있다. 뭔가 시적인 발상이 있어야 시를 짓겠는데 글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며 하소연한다. 영화도 보러 가고, 산책도
1920년대 재즈는 미국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출발한다. 뉴올리언스 중에서도 스토리빌을 재즈의 탄생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동네는 한마디로 홍등가였다. 뉴올리언스는 항구도시였기에 다른 항구도시들처럼 밤의 여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1897년 도시정화 차원에서 당시 부시장이었던 시드니 스토리가 그 자리에 창녀들을 모아 유곽을 만들 것을 제안했고 이는 성사되어 그 거리를 스토리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매춘업소들은 술집을 겸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비지니스를 위해 방문한 손님들의 흥을 돋울 필요가
서늘한 영화가 있다. 잔혹한 설정도 없고, 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닌데, 보고 있자면 오스스 소름이 돋는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가 그렇다. 설정부터 가차 없다. 엄마가 떠난다. 아빠가 다른 네 남매를 남겨놓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다. 그저 방치되었다. 사회는 간단히 이들을 잊는다. 아이들은 엄연히 살아있으나, 누구도 아이들이 거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영화의 제목처럼. 관객만 알고 있다. 이들에겐 오직 파국이 예정되었다는 것을. 관객은 이 사실을 아는데, 아이들만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올해 본 전시 중 가장 눈에 띄는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일 것이다. 개관과 폐관을 반복하며 진행되고 있는 이 전시는 반려동물인 개에게 최초로 개방된 전시다. 개인적으로는 가족이지만 공공장소에 함께 갈 수 없는 존재인 반려동물에 대한 개방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모토 '모두를 위한 열린 미술관'이라는 의미의 확장성을 실험하는 전시가 됐다. 전시기획자는 "나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 광장인 미술관에 인간 외 다른 존재인 개를 초청하는 다소 황당한 기획을 제안한다. 일종의 우회
올해는 대전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눈물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용래 시인이 타계한 지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최근 여러 지면을 통해 박용래 시인을 추억하고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특히 대흥동 소재의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는 대전문학기록 아카이브 특별전으로서 박용래 시인의 전시관을 상설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 시인다운 삶을 산 시인"으로 기억되는 박용래 시인의 시적 발자취를 살펴볼 좋은 기회이다.보문산 사정공원에 가면 대전·충남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문학적 업적을 남긴 시인들의 시비를 조성
가장 중요한 미국 초기 재즈 연주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시드니 베셰 (1897~1959)는 재즈의 탄생지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지난 호에 언급한 것처럼 그의 형인 빅터 베셰는 치과의사였을 정도로 그는 유복한 크레올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형은 치과의사였을 뿐 아니라 트럼본 연주자였고 밴드리더였다. 시드니 베셰는 어려서부터 악기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드디어 6살이 되던 해 형의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한다. 그의 화려한 데뷔 무대였던 셈이다. 이윽고 그의 활발한 연주활동은 1911년을 시작으로 뉴올리언스의 수많은 연주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한다. 이는 단지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반복한 낡은 표현도 아니고, 얼치기 은둔 거사의 허망한 고백도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지금, 실제로 일어나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창궐하는 감염병과 그를 막기 위한 거리두기 속에서, 지금껏 가꿔왔던 생활방식은 여지없이 흔들렸다. 이동은 줄고, 만남이 기피되고, 관계는 소원해졌다. 어쩔 수 없다. 피해를 모면하려면, 혹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변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 돌리고, 귀 닫고, 제 주장만 앞세우는 이들. 어떤
자가격리는 코로나로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상적 언어가 됐다.코로나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리와 고립이라는 점에서 바이러스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인간 내부로 들어온 이 바이러스는 자기격리를 통해 방지와 통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공존하며 살아가기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줬다. 우리는 격리라는 강요된 여가의 1인칭 경험을 통해 일상을 재경험하고 있다.코로나19 이후 국내외 미술관에서는 '온라인 뷰잉룸', '버추얼 투어' 등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거나 작가들이 '줌'과 '스카이프'를 이용해 대중과의 소통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