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을 살아서 맞는 일은 기적이다. 가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세우며 강한 고요를 안쪽에서부터 확장해간다. 하늘은 청명하고, 모과나무 가지에서 모과가 익어갈 때 제 궤도를 도는 행성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물은 언제나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해살이풀들은 시들어 버석거리고, 철새는 기하학적 편대를 이루고 북쪽에서 날아온다. 하지만 저탄장에 쌓인 석탄은 더 이상 까매질 필요가 없고, 젖소에게서 짜낸 젖은 더 이상 하얘질 필요가 없다. 가을은 외롭고 슬픈 영혼들의 합주로 완성된다. 달이 가을밤의 지휘자라면, 물은 겸손하게
그날 나는 여행가방을 사야한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으므로 중고 물건이면 충분했다. 원하는 브랜드, 원하는 크기의 중고 여행가방이 강남 어디쯤에 마침 있었고 게다가 거래장소 바로 근처에 절친이 살고 있었다. 여행가방을 사러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내 다음날 만날 약속을 정하기 시작했다.오랜만의 만남이 일사천리로 성사되는가 싶었다. 친구의 집으로 갈지 가까운 음식점에서 만날 지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갑자기 양해를 구했다."잠시 후에 다시 연락할게. 주
정당불신이다.국민 10명 중 7명은 "양당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한다.양당 지지층조차 절반 넘는다.'대통령 당으로의 거듭나기와 주류세력 교체'로 바쁘지만 국민은 냉담하다.윤 대통령 100일의 여론조사 92개에 나타난 정당 지지율 흐름은 상반된다.국민의힘은 지방선거 때 최고치를 찍은 후 계속 하락하여 9주차부터 30% 중후반대를 유지한다.민주당은 11주차 이후 국민의힘에 계속 앞선다.최근 10개 조사로 좁혀보면 민주당이 7:3으로 앞서지만 내용은 복잡하다.민주당 지지율은 최고 49.3% 최저 33% 국민의힘도 최고 38.4% 최저
기록적인 집중호우에 도시는 마비되고, 농촌은 큰 상처를 입었다. 침수된 차량이나 무너진 건물은 다시 고치고 지으면 되지만 안타까운 인명 피해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 이번 폭우로 반지하에 거주하던 세 식구가 들어찬 물의 수압으로 문을 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은 그 어떤 폭우 피해 소식보다 마음을 찢어 놓는다. "하늘은 과연 있는가?" 역사가 사마천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하늘이 있다면 평생 나쁜 짓만 하며 살았던 도척 같은 도둑의 괴수는 왜 천수를 누리며 잘살다 가게 하고, 백이와 숙제 같은 의로운 사
훈계질이 싫다. 얕은 지식으로 깊이 아는 체를 하는 자를 경멸한다. 소음과 서커스, 거짓과 허언, 정치가의 웅변이 싫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이념들, 일체의 회의주의도 없는 종교, 영혼이 깃들 여지가 없는 과학, 자동차 경적을 마구 울려대는 자를 싫어한다. 무능력한 가장, 함량미달의 책들, 말없이 끊는 전화, 자기가 정의롭다고 외치는 자들, 낯색 변하지 않고 뻔뻔한 말을 늘어놓는 정치가들, 탐식하는 자를 싫어한다. 봄날 아침 숲속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 펄럭이는 깃발, 4월의 잎사귀들, 막 떠오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떡갈나
어린 시절 나를 생물학의 길로 이끌었던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들의 생태에서 마법같은 이야기들을 뽑아내던 장 앙리 파브르와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 늑대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어니스트 시튼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춘기 이전까지 나의 숨겨진 자아 정체성은 늑대였다. 내가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방구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내가 늑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둑한 화장실에서 낯선 침입자 늑대를 물리치고 마루 아래 숨겨진 덫을 찾아내고 장농에 숨겨둔 어
권력의 결심은 확고하다.지지율 하락은 감당할만하고 감수할 수 있으며 새로운 권력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의 결과다.권력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갖는다.하나는 단기대안으로 지지층 중심의 진영접근이자 보수적 요구의 부응이다.대통령의 "국기문란"과 "국가범죄" 언급을 두고 일부에서는 '문재인 정권 털기의 사정정국 강경 드라이브 임박'으로 해석한다.문제는 단기처방으로 지지층을 지킬 수 있느냐 인데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최근 여론동향을 보면 "데드크로스"를 넘어 "출범 한 달 20일 정도에 이런 사태는 심각한 상황"의 "총체적
어려서 외할머니 아래서 외삼촌들과 함께 자랐다. 오랫동안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북부의 운천이라는 소도시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운천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미군부대에서 용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낯선 고장에서 삶을 개척하는 젊은 가장의 수고와 고단함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랐다. 영유아기 때 아버지와의 접촉 기억은
우리집은 광화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광화문에도 사람이 사냐는 반문이 흔히 돌아오곤 한다. 광화문에 사람이 산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출장을 가면 헬리콥터가 우리집 위로 날아갔다.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가 상당히 커서, 대통령의 지방 일정을 모르고 넘어가기 어려웠다. 이제 청와대는 시민공원이 되었으므로 그 일도 모두 추억이 되었다.광화문이라는 특별한 동네에 한평생 살다보니 이래저래 정치가 일상생활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내가 30대였을 때까지는 대통령이 한번 출타할 때마다 20~30분은 족히 걸리는 교통통제를 했다. 대통
"재벌 집안에 아들과 아버지가 있는 줄 알아?" 집안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해보라는 내 권유에 재벌 회장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그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낼 때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그 말을 듣고부터 그를 만나고 나면 뭔가 허전했다. 한번은 임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저렇게 굽실대기만 하는 놈들이 회사에 꽉 차 있다. 저놈들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겉치레 겸손을 수없이 보며 자랐을 재벌 아들 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어
윤석열 대통령 취임후 발표되는 국정 지지율이 심상치 않다. 취임초임에도 낮은 지지율 조사가 발표되고 있고, 지지율 성격도 갈등형 구조라는 점이다.취임 이후 불과 한달이 지난 시점이라 아직 윤대통령 지지율 분석을 하는 것이 이른 감도 있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으로 문정부와 대립하면서 사실상 2년 동안 유일한 야당 대통령 후보였고, 국민들은 인수위 시절 국정 인수 과정도 보아 왔기에 짧다고 보기도 어렵다.먼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지지율과 비교해서 많이 낮다. 대통령 지지율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방법
여름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섬머타임(Summer time)'이란 노래 때문이다. '여름이란다. 그리고 삶은 평온하지./물고기는 뛰어오르고 목화는 잘 자랐다네./오, 아빠는 부자고 엄마는 미인이란다./그러니 쉿, 아가야, 울지 마렴.//이런 아침이 계속 되면 넌 다 커서 노래하겠지./넌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거야./하지만 그때까지 아무것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엄마 아빠가 네 곁에 있으니'.(조지 거슈인, 1919) 여름이 올 무렵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노래에 담긴 아련하고 슬픈 노스탤지
손 안의 작은 기계에 정신을 위탁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 어떤 앱들은 나에게 예의바른 질문을 던지곤 한다."당신이 나 말고 다른 앱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제가 사용자의 활동을 추적하도록 허용하겠습니까?"나는 이런 문제에 인심이 후하다. 온라인상의 내 개인 활동 이력이라고 해보았자 몇몇 친구들의 sns 안부와 뉴스 따라잡기, 조촐한 생필품 구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철통같이 보호해야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다른 앱에서 검색한 내용을 참조하여 예상치 않은 순간에 슬그머니 들이미는 알고리즘의 센스야말로
1976년 12월, 진눈깨비 날리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한 학생이 경찰을 따돌리며 홀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구경만 하는 학생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의 추악상을 감추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로비를 벌인다는 것이었다.이범영! 미국 의회 청문회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박동선 스캔들이 그 4학년 선배의 시위로 국내에도 알려져 박 정권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숨죽이던 사람들이 그때부터 기지개를 켰고,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것은 부마사태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김재규의 총성으로 끝을 맺고 말았
우리나라는 5년 단임 대통령제다. 따라서 4년 중임제 미국과는 국정운영이 다르다. 미국은 대부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는 관계로 첫 4년은 중장기 국정계획을 추진하고, 다음 4년 임기는 성공적 관리에 중심을 둔다. 반면 5년 단임의 우리나라는 임기초 1·2년동안 주요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3·4·5년차에 관리하여 성과를 내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5년차는 레임덕을 방지하고 정권 재창출을 준비한다.5월 10일 출범한 윤석열 대통령의 5년도 국정성과를 내기에는 매우 짧을 수도 있다. 특히나 윤석열 정부의 과제는 어느 대통령보다 난제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 누이들은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실이나 노끈의 양쪽 끝을 연결한 실테를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번갈아가면서 손가락으로 걸어 떠서 여러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이 놀이는 심심함을 잊기에 좋았다. 누가 실뜨기 놀이를 고안해냈는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이들은 그 즐거움에 빠져 보냈다. 간혹 어른들의 꾸지람도 없지 않았지만 누이들은 한나절을 찐 고구마를 먹고 까르륵거리며 실뜨기 놀이에 열중했다. 실뜨기 놀이는 나바호족, 에스키모, 오스트레일리아나 뉴기니 원주민이 만든 놀이 중 하나라고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주말마다 관악산에 올라갔는데, 사람이 드문 산길에서는 슬그머니 마스크를 벗었어. 지난 2년동안 산속에서 ‘마스크 씁시다’ 하는 소리를 두 번 들었어. 예, 하고 지나쳤지.”우리는 산속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감염 예방에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한 번 겪었는데, 횟수가 적다고 해서 내가 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만난 사람은 “마스크 씁시다”라고 점잖게 말하는게 아니라 “마스크 똑바로 쓰지 못해?” 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날 나는 마스크를 잘 쓰고 있었으므로 그 고함은 나를
검사가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범죄와의 싸움, 범죄인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무서운 것일까. 현 정권은 지금 검수완박을 밀어붙이고 있다. 국민들에게 "죄가 없으면 검찰 수사권을 박탈할 필요가 없는데 얼마나 죄가 많길래 저렇게 서두르지?" 하는 의구심만 키워주고 있다.검수완박이 된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라지겠는가. 누가 봐도 스스로 범죄자임을 자백하는 듯한 그들을 검사 출신 대통령이 그냥 두겠는가. 공직자 임명은 대통령 권한이니 베테랑 검사 몇 명만 경찰로 임명해 수사를 지휘하게 하면 정
문재인 대통령 당선 1년 후 2018년 이해찬은 민주당 20년 장기 집권을 이야기 했다. 다음해 당대표로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확보하자 현실화 될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1933년 이후 30여 년 민주당 장기 집권 선례도 있었다. 집권 전략으로서 정책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벤치마킹해 그린 뉴딜을, 통치는 조선의 태종과 세종을 모델로 삼기도 했다.그러나 20년 집권 꿈은 5년만에 끝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국민은 헌법상 대통령 5년 임기와 상관없이 지난 30년간 노태우∙김영삼,
바둑을 사랑한 사람으로 동네 기원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며 승부에 몰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말마다 바둑 두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었다. 바둑에는 패배의 쓰라림이 있고, 승리의 달콤한 쾌감과 명예로움이 있다. 동네 기원이 사라지는 것은 바둑 인구가 줄고, 기원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테다. 승부의 짜릿함에 취해 기원에서 낮밤을 흘려보낸 기억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다.바둑은 흑백으로 나뉜 상대가 가로 세로 19개의 줄이 교차하는 361군데 중 한 곳에 돌을 착점하며 누가 더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