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경보가 발령되던 날 아침이다. 열한 시까지 시립미술관 입구 매표소 앞에서 만나자는 문자를 확인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짜증이 난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무슨 모임을 거기서 하느냐고 토를 달고 싶었다. 하지만 어렵게 예약했다는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미술관에 도착했다.전시 제목은 '이건희 컬렉션과 신화가 된 화가들'이었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우선 시원해서 좋았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고 미적 감각도 둔하지만,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신화가 된 화가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이중
오늘은 우리 동네에서 숲길이 가장 좋은 두루봉으로 향한다. 이제 겨우 보름째.숲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만나는 나무 밑에 운동화를 벗어놓고 맨발로 걷기 시작한다. 두어 발자국을 떼자마자 굵고 가는 하얀 돌가루가 무시로 밟혀 화들짝 놀란다. 눈앞의 1-2미터를 바라보며 보폭을 짧게 해서 걸어야 효과가 있다는데, 도무지 통증 때문에 멀리는커녕 코앞을 들여다보기 바쁘다. 다행히도 그곳을 지나니 볏짚으로 짠 매트가 흡사 카펫처럼 깔려있다. 언덕길이지만 영화제에 참석한 여배우라도 되는 양, 모처럼 어깨를 펴고 우아하게 걸어본다. 이번엔 다양한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고 기상이변으로 인해 세계 곳곳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험난한 재해로 무성하다. 그러나 이처럼 힘들고 지칠 때 잠시라도 쉴 곳을 찾는 나의 안식처는 과연 어디였던가?그래서 이번 여름엔 몽골을 선택했다. 아직은 인공이 많이 가미되지 않은 신선한 대자연에서 방출되는 평온과 쉼을 얻어올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곳을 택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잘 선택한 나의 멋진 커렌시아였다.마치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투우 경기에서 지친 황소가 경기를 하다가 잠시 잠깐 쉬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그 달콤한 쉼 같은 그런 시
며칠 전 뉴스에서 요즘 어르신들이 잘 가는 곳이 '인천국제공항'이라고 한다. 노인들이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을 가는 것이 아니다. 시원한 공항 안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간을 때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노인을 위한 여가문화가 이렇게도 없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시대'라고 하면서 정작 노인을 위한 문화가 여전히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2025년 접어들면 대한민국은 노인인구가 천만 명이 된다고 한다. 노인은 부양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짐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양한
전화가 왔다. 몇 년 전에 봉사하던 문학관의 팀장이다. 옛날 제자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데 알려줘도 되느냐고 묻는다. 찾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다. 40여 년 전 근무했던 여중학교 때 제자라고 한다. 이름을 들어도 가물거린다. 그래도 제자라며 전화 오는 일이 드문 일이라 그러시라고 했다.그런데, 전화를 끊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왜, 무슨 일로 나를 찾나. 예전 같으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텐데 오히려 불안하다. 이런 기분이 뭐지? 머릿속은 나도 모르게 수십 년 전 내가 섰던 교단을 스캔하고 있었다. 성적 나쁘다고 종아리 치던 일,
문해력 관련 연수가 부쩍 늘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그것인데, 중요성을 운운하자면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닐 것이다.낱말을 모르거나 전체적 맥락을 잘못 이해해서 비롯된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얼마 전 SNS에서 논란이 됐던 사례이다. '심심한 사과'에서 '매우 깊이 사과하다'의 의미를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다'로 해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정통신문 문구에서 '중식 제공'을 '중국요리를 제공한다'로 받아들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문해력 기르기' 검색 키를 누르자 관련 프로그램들이 기다렸다는 듯 화면 가득 펼쳐진다. 유아기부
K 시인은 당신 주변의 문우들이 작품집을 발간하거나 잡지에 글이 실리면, 발췌한 시행을 화선지에 친필로 담아 보내주신다. 나는 처음 일반우편으로 받아 든 글자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나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인 듯 달뜬 기분에 취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선생의 글자를 만남으로써 내 착각이 민망했으니, 마음 품이 너른 선생의 심미안(審美眼)과 따뜻한 손길이 빚어낸 미더운 솜씨를 더욱 귀하게 간직하며 기억한다.새 책을 출간하는 동료 작가들이 우편으로 자신의 저서를 보내올 때가 있다. 서적을 받아 두 손에 펼쳐 들면 부러움에 이어 존경심
두 남녀가 탱고를 추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여인의 향기'를 아는가?젊은 아가씨가 스텝이 엉킬까 봐 머뭇거릴 때 퇴역장교 프랭크(알파치노)는 이런 말을 한다. "탱고는 스텝이 꼬이는 것이고 꼬이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인생도 그렇다." 이처럼 탱고는 즉흥 춤이기에 스텝이 꼬이면 꼬이는 대로 그냥 추면 된다. 스텝이 엉켰다고 머뭇거리는 순간 둘의 춤은 엉망이 된다.아르헨티나 탱고를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라고 한다. 두 명이 춤을 추지만 한 호흡으로 하나가 돼 함께 움직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필자의 취미는 아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나고 제방이 무너지던 날, 나는 옛날 농가, 시골집에 갇혀 있었다. 우리 집은 동네 안길보다 낮은 도로 안쪽에 위치해 있다. 쏟아지는 빗물이 도랑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마당으로 역류한다. 손쓸 새도 없이 마당이 저수지로 변했다. 이미 헛간 바닥은 물에 잠겼고 아래채 살림방 문지방까지 넘실거린다. 이걸 어쩌나. 무엇인가 하긴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TV에서는 산사태로 마을 전체가 사라진 모습과 지하도에 수몰된 자동차와 인명 피해를 숨 가쁘게 보도하고 있다. 스마트폰에는 재난 문자가 폭우처럼 쏟아져
"틱톡영상을 아는가요?" 15초 영상올리기 문화가 요즘 젊은 세대들의 소통이며 놀이문화다. 젊은 세대들은 유튜브의 쇼츠, 인스타그램의 릴스 등 짧지만 임팩트 강한 영상들로 자신을 표현한다.MZ세대의'밈(meme)'문화와 리뷰문화는 MZ세대 그들만의 행동양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밈문화는 과거연예인의 우스꽝스런 모습의 포착, 과거 콘텐츠를 재소환해 재가공하고 SNS에서 공유되며 즐기는 문화다. 리뷰 놀이문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제품검색을 하거나 맛집을 찾을 때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뷰 글을 읽는 것이다. 제품구매 리뷰와 댓글
생물체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필요한 것중 하나는 적당한 온도일 것이다. 자연의 온도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엄마는 따뜻함의 대명사이다. 생물체 중에서도 인간이 태어나서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엄마이기 때문이다.이담하 시인(1962-)의 시 '입 속에 들어 있는 두 계절'에서 아픔과 애틋함이 엄마의 말 속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되풀이 되는 문제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생명수 같은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기도 줄 수 있고 절
"연극을 보는 내내 너무 설렜어요! 연극을 보는 것도 너무 좋고 제가 이 나이 먹고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아요. 설레네요, 선생님" 필자가 진행하는 연극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알게 된 육십이 넘은 손 선생님이 극단에서 올린 '내 아버지'라는 연극을 보고 나서 부끄러운 듯 살며시 내민 말이다.설렌다는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것도 연극을 하게 돼서 설렌다는 그 말이 내 마음에도 콕 꽂힌다. 설렘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림.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만 움직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짙푸른 숲이 비를 맞고 있다. 단풍나무도 비목도 긴 장마에 지쳤나 보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혼자 천년고찰까지 걷는 여기는 동학사 계곡이다. 승가대학 돌담은 온통 푸른 이끼가 차지했다. 벚꽃이 환한 봄날이면 저 돌담 꽃그늘에 기대어 사진을 찍곤 했는데….그동안 계룡산의 한 컷 한 컷이 생각난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나들고, 병사골에서 장군봉에 이르고, 돌계단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은선폭포에서 연천봉 관음봉까지, 옆구리에서 날개라도 돋을 것 같았던 자연성릉의 아름다운 풍경, 쌓인 눈 위에서 비박하던 어느
워킹맘에게 퇴근은 육아로의 출근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면 열 살 딸아이는 필자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재잘거린다. 딸이 말을 할 땐 딸을 쳐다봐야지 딴청을 부렸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딸은 요즘 새로 나온 여자 아이돌의 안무를 추며 자기를 봐 줄 것을 종용한다. 저녁을 차리면서도 눈은 딸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딸이 질문을 했을 때 건성으로 대답하면 영혼이 없다며 영혼을 가득 담아 대답할 때까지 같은 질문을 계속한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주위가 산만하다. 딸은 필자 곁에서 한
열 살 때의 일이다. 큰집에서 바심(추수)를 하기 위해 술을 빚었다. 배가 몹시 고픈 필자는 큰집 부엌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술지게미(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를 훔쳐 먹고는 술에 취해 큰집 마루에 큰 大 자로 누워 버렸다. 이를 보신 할머니께서 "어린 놈이 벌써부터 술을 훔쳐 먹어!,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하시며 부지깽이로 두들겨 팼다. 필자는 잠들어 있다가 혼비백산하여 뒷산으로 비틀거리며 도망가 누웠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오셔서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술지게미를 먹어! 불쌍한 내 새끼." 하시며 집으로 업어
톨스토이는 예술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을 소통시키는 한 수단이며 따라서 진보, 즉 인류가 완성을 향해서 전진하는 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언어와 문자가 지금 세대에게 전 세대의 경험과 사색으로 알아낸 것들을 모조리 알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는 것처럼 예술 또한 지금 우리에게 옛날 사람들이 경험한 감정이나 현재 경험하고 있는 감정을 문학, 미술, 음악, 공연 등을 통해 경험시켜 준다.예술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을 좀 더 다채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떠주게 한다. 예술교육을 통해 개개인의 예술적 감성을 키울 수 있으며
새벽까지 폭우가 내리던 월요일, 출근하니 사무실 문에 '에어컨 사용 불가'라는 무서운 안내장이 붙어 있다. 지난 주말 낙뢰로 인해 금요일까지 에어컨 사용이 불가하다는 내용이다. 숨이 턱 막힌다. 판타지처럼 이 문턱을 넘으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순 없을까.한동안 재벌들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많았다. 정말 저렇게 살까? 도우미들을 식탁의 촛대처럼 세우고 식사하는 것은 일상이고, 운동장 같은 정원에서 오케스트라를 불러 가든파티를 한다. 어떤 재벌이 내놓은 어마어마한 미술품을 보니 드라마 속 재벌 모습이 과장은 아니었다. 저들의 화폐단위는
며칠 전, 동네도서관의 사서 아가씨에게 책에 낙서를 했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지난 몇 차례. 시간에 쫓기느라고 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중요 표시를 한 후에 채 지우지 못하고 반납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번번이 책에 낙서하는 요주의 인물로 입력이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사실 그날은 작심하고 내가 체크한 부분을 독서 노트에 옮겨 적은 후, 지우개로 지우느라고 열람실에서 거의 두 시간가량을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가 펼쳐 보이는 반납 책자 네 권 중 한 권에는 연필로 그은 밑줄과 강조하는 표시가 선명하게 남아
학마을은 옛날 충남 연기군의 초입이었다. 지금은 세종시 금남면 감성리로 편입이 되어 도시의 이미지가 다소 강해졌다. 그러나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연기군 희망 전보 순위 1순위인 곳이다.충남지역이지만 대전에서 출퇴근하기가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치원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정말 그림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여지없이 끄는 곳이기도 하였다. 바로 학교 뒷산엔 금병산자락을 아름답게 드리우는 초록 소나무 숲이 지금 생각해 봐도 명품급이다. 그 아름다운 소나무 위에 하이얀 백로들이 기품 있게 앉아 노니는 모습이야말로 정말 그림
필자는 연극배우다. 본격적으로 연극인으로 살아간 지는 이제 8년째. 배우로서는 여전히 햇병아리라 볼 수 있다. 국가기관연구원으로 살아가다가 불현듯 연극배우의 꿈을 안고 연극인이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돈도 안 되고 인정도 못 받는 연극을 왜 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최근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지역 특성화 교육의 일환인 연극프로그램 '꽃피는 인생극장'에서 즉흥연기를 참여자들과 함께해 봤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뭔가를 발견한 것 같다." "생애 처음으로 해 본 것이지만 너무나 멋진 경험이었다." "상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