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에 따르면 "명종은 이황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한 후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박영규, 2014).조선의 13대 임금인 명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5번이며 별칭은 탐구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욕과 은둔·자신감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탐욕은 지식과 연결되며, 이들에게 인간관계는 별로 중요하
인종의 멘토를 자처하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자신이 아들(명종)을 낳자 세자로 삼기 위하여 세자 시절의 인종을 견제했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에 불이 났는데, "야사에 따르면 인종은,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를 기다렸다. 이 때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그를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와 불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왕).인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3번이며 별칭은 '성취자'이다.
야사를 기록한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 현종이 불장난하는 것을 본 한 상궁이, '할아버지가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탄 것을 빗대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댄 것인데, 뒷날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상궁을 불러서 '내가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 있었다'며 궁에서 내쫓았으나 계속 식량을 대주었다고 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대역죄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현종의 따스함을
1722년(경종 2) 3월 조선 정국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객, 독살, 위조 교서에 의한 폐출의 수단을 써서 경종을 몰아내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었다. 이 일로 노론세력의 주요 대신 등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다. 임인옥사였다. 그러나 독살 기도 부분에 대하여는 관련 증언에도 불구하고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며 수사를 중지시켰다'"(이덕일·2
1674년 8월 23일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송시열에게 원상(院相:임금의 멘토)을 청함과 동시에 부친의 능 지문(誌文)을 지을 것을 명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 때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이필익을 유배보내자 대사간 정석 등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는데, 숙종은 "'내가 어린 임금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내가 심히 통탄스럽고 해괴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고 꾸짖었다"(이덕일·2010). 어린 나이에 실로 대담한 조처였다.숙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
1616년 만주 일대의 여진족 세력을 규합한 누르하치가 '대금'을 건국하여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명나라를 압박하자 국력이 쇠락한 명은 1618년(광해군 10) 4월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당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의 대신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이구동성으로 파병을 주장했다. 이에 1619년(광해군 11)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여 명의 군대가 명군에 합세해 후금에 맞섰으나 패퇴했다. 이 상황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후금 장수)과 몰래 통하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한 당일로 성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으므로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정사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렴청정은 성종이 성년이 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대비와 공신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75년(성종 7) 대비를 비방하는 투서 사건을 계기로 대비가 정권이양을 언급하자 공신들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성종은 몇 차례 사양하다가 다음과 같이 정권 수용의사를 밝혔다. "'내가 생각하기에 온 나라의 번거로운 사무로 성체(聖體:대비
세조는 즉위 과정이 무리했던 만큼 엄청난 수의 공신을 양산하고 이들을 특권층으로 만들어 왕권을 나누어 가졌다. 한 예로 이들은 백성들의 세금을 선납한 후 그 대가로 몇 배의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였는데 그 폐해가 막심했다. 이를 막고자 예종은 즉위 초부터 대납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근절되지 않자 방을 붙여 대납 금지를 재천명했다."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입법의 본 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고 있다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
1789년(정조 13) 10월 16일 양주 배봉산 수은묘에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시신은 아들 정조에 의해 화성의 현륭원으로 이장되었다. 이에 앞서 7월 11일에 조정에서 이장에 대한 결론이 나자 정조는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고 했다(이덕일, 2010). 27년 전 부친이 뒤주에 갖힌 채 죽어가던 참상을 목도한 아들의 입장에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정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영조가 재위 20년(1744년) 5월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 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 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 자기)도 없어서…여항(閭巷; 민간)의 호귀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이덕일, 2010).영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사도세자가 어릴적에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비단과 무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으냐'고 부왕이 묻자 '무명이 더 낫다'면서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했다.(어제장헌대왕 지문)"(인물한국사). 사도세자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심'과 '수치·불굴'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 생활을 했던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복수설치, 즉 청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기 위한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그는 재위 10년 3월 11일 승지와 사관도 물린 채 송시열과 담판을 벌였는데 송시열은 이를 '악대설화'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한 포병 10만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가 예기치 못할 때에 관으로 쳐들어 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이덕일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마친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 달 만인 1645년(인조 23) 4월 26일 34세의 나이로 급서하자,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 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나 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 대신 묘(墓)자를 쓰게 했다. 장남의 상사에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 좌상 홍서봉 등은 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이덕일, 2010). 인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
1637년(인조 15) 1월 병자호란을 매듭짓기 위한 청(淸)과의 강화협상 결과,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세자로서 인질이 된 소현세자는 그해 4월부터 심양에서 8년 간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소현세자는 귀국 직전 북경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 등을 선물로 받았다. 이때 그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아담 샬은 그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고 세자는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양녕대군이 세자시절 자신이 탐하던 여인 '어리'가 태종에 의해 궁궐 밖으로 내쳐지자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이 문제로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 5월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는데 세자는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하기를,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이를 받아들입니까? 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이덕일·2010)양녕대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1846년 흥선대원군은 충청남도 (예산군)덕산 대덕사의 한 고탑(古塔)이 길지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이때 그는 주지에게 거금을 주고 절을 소각하게 했는데, 형들의 꿈에 똑같이 탑신이 나타나 '이곳에 묘를 쓰면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모두 두려워했지만 막내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문전을 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 때 잘 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일갈하고는 이장을 단행했다."(이덕일, 2010)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
"성종은 1492년(성종 23년)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이지만 문리를 해득치 못해서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연산군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하여 1500년(연산군 6년) 10월 사헌부에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는 경연에 나오시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아 6년 동안 '통감강목' 1부도 다 진강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상소했다."(이덕일, 2010)연산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개인주의자' 또는 '예술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심'과 '수치(shame)'라
1384년 정몽주가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올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며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국교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는데 친원파들은 정몽주를 제거할 요량으로 그를 추천했다.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더구나 명 태조의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날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일협약안' 강제 체결 음모는 고종과 대신들에 대한 반복되는 협박과 회유 끝에 11월 17일 '을사오적'의 동의로 마침내 종결되었다.고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피암시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근심 걱정이 없
1580년(선조 13년)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해 근무할 때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만호진 객사 앞의 오동나무를 요구하자 관물이라며 내어주지 않았다고 전한다.이순신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걱정'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옳은 것에 집착하며 타인에게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진정한 완벽주의자다. 세부사항까지 통제하고자 하며 앞 일을 내다보려는 욕구가 있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므로 완벽해지려고 한다. 분노를 억누르며 점잖고 예의바르다.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