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21)부여 출신 박영희 장군
스승 이세영 따라 만주 망명, 신흥무관학교 입학
김좌진 장군 최측근… 북로군정서·신민부 활동
블라디보스토크 파견 갔다가 러 정보기관에 숨져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 위치한 박영희 장군 생가. 손자인 박병호(전 충남도의원)의 소유로, 부여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김재근 선임기자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 위치한 박영희 장군 생가. 손자인 박병호(전 충남도의원)의 소유로, 부여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김재근 선임기자

전쟁과 전투에 수많은 군인이 등장하지만 역사에 남은 인물은 극소수이다. 그 많은 사람을 기록할 수도 없거니와 구태여 그 이름을 남기지도 않았다. 부여 출신 검추 박영희 장군을 학계에서는 '청산리전투의 잊혀진 영웅'이라고 부른다. 타고난 군인으로 지휘관과 병사를 양성하고, 전투에 참전했으며 군사 이론에도 밝았다. 김좌진 장군의 부관과 참모, 보안사령관으로 늘 함께 했으며 김좌진의 밀명을 수행하다가 피살됐다. '잊혀진 영웅'이라 한 것은 광복을 위한 그의 헌신과 희생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검추 박영희 장군 (김좌진 장군의 부관, 보안사령관으로 활동했던 부여 출신 독립운동가)
검추 박영희 장군 (김좌진 장군의 부관, 보안사령관으로 활동했던 부여 출신 독립운동가)

검추는 1896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서 박동익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유학을 숭상했고, 그가 태어난 가곡리를 곡부(중국 산동성의 공자가 태어난 마을)라고 부르는 데서 보듯 검추는 어린 시절 유가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한학을 배우던 검추는 1908년 동네에 신명의숙이 생기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이 학교에서는 유학과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그의 부친 박동익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박동빈 이세영 김천규 등과 함께 교사로도 일을 했다. 이중에서 이세영은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항일의식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종식의 홍주의병에 참모장으로 참전했다가 체포돼 귀양을 다녀온 전력도 있었다.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세영은 청양 장평에 성명학교를 세웠고, 인근 부여의 신명의숙에서도 가르쳤다.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생가 옆에 독립투사 박영희장군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생가 옆에 독립투사 박영희장군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검추는 신명의숙을 마치 뒤 서울의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무렵에도 계속 스승인 이세영과 교류했고, 그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세영이 1913년 5월 만주로 망명했고 박영희도 그를 따라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검추는 진주 김씨와 결혼한 뒤 신행도 하기 전에 집을 떠났으며, 훗날 부인이 만주로 가서 남편을 만나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포도밭으로 변한 통화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 추정지. 현재 행정구역은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광화촌 제7 촌민소조이다. 자료=독립기념관
포도밭으로 변한 통화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 추정지. 현재 행정구역은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광화촌 제7 촌민소조이다. 자료=독립기념관
옥수수 밭으로 변한 신흥학교 학우단 본부 터 추정지. 사진=독립기념관
옥수수 밭으로 변한 신흥학교 학우단 본부 터 추정지. 사진=독립기념관
신흥무관학교 학우단 규약. 자료=국가보훈부
신흥무관학교 학우단 규약. 자료=국가보훈부

1910년대 만주 서간도에는 이시영 이회영 이상룡 등 신민회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1년 독립운동과 민족교육, 인재양성을 위해 삼원보에 신흥강습소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통화현 합니하에 규모를 키워 신흥무관학교를 개설했다. 아산 출신의 이세영은 신흥강습소 소장과 신흥무관학교(신흥중학교) 교장으로 일했고, 박영희는 이 학교의 초등군사반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실력과 인성이 빼어났던 검추는 졸업하자 마자 교관과 학도감을 겸직했다. 학도감은 생도들을 관리 통솔하는 자리였다.

이 무렵 검추는 북로군정서로 옮겨가면서 김좌진과 만나게 된다. 1919년 북간도에 대종교가 주축이 돼 무장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가 설립됐는데 총재는 대종교 지도자 서일, 총사령관은 군사전문가인 김좌진이었다. 김좌진이 서로군정서에 병사들을 가르치고 전투를 지휘할 인력을 요청하자 수장인 이상룡이 신흥무관학교 인재들을 보내줬다. 이때 검추도 무관학교 교관 및 졸업생인 이범석 이장녕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오상세 백종열 김춘식 강화린 이운강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로 가게 된다.

북로군정서 총재부가 있던 곳. 현재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칭현 왕칭진 유수하자촌 일원이다. 사진=독립기념관
북로군정서 총재부가 있던 곳. 현재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칭현 왕칭진 유수하자촌 일원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왕청현 서대파 북로군정서 본부 터. 현재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향 장영촌 마을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왕청현 서대파 북로군정서 본부 터. 현재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향 장영촌 마을이다. 사진=독립기념관
북로군정서가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사관연성소 입구.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향 장영촌 마을에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북로군정서가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사관연성소 입구.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향 장영촌 마을에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검추는 북로군정서에서 김좌진 사령관의 부관과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겸직했다. 사관연성소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병영을 짓고 청년들에게 군사지식을 가르쳤다. 기초훈련을 마친 600명 중 300명을 골라 지휘관에게 필요한 정신교육과 역사, 군사학, 술과(병기와 부대지휘) 등을 교육했다. 1920년 9월에는 연성소 졸업생 300명으로 교성대를 편성했다.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초기에 500여 명, 나중에는 1600명으로 늘어났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의 백운평 갑산촌 어랑촌 천수평 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의 주축은 사관연성소에서 배출한 정예병력이었다. 검추 역시 김좌진 사령관의 부관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중-소 국경인 밀산으로 갔고, 여기서 여러 독립군 부대가 통합, 출범한 대한독립군단에 참여한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3500여 명에 이르렀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 외교부장 최진동, 참모부장 김좌진, 참모 이장녕 나중소, 군사고문 지청천이었으며 박영희는 제1여단장 김규식의 참모를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정부의 밀약에 따라 보급을 받기 위해 1921년 6월 러시아 아무르주 극동공화국 자유시(스보보드니)로 갔다. 여기서 독립군 부대는 볼셰비키 군대 산하의 예속을 거부했다가 포위돼 살상당하는 자유시참변을 겪는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부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달레네첸스크)에서 회군하여 피해를 면했고, 병력 일부를 이끌고 자유시로 갔던 검추도 만주로 돌아와 북로군정서에 합류, 조직을 정비했다. 이때 검추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1923년 검추는 상하이에서 창간된 <배달공론>이라는 잡지에 '군사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2차례 글을 실었다. 이 잡지를 발행하는 김인해의 요청에 따라 군대의 구분과 명령, 통보 등 전문 군사지식을 작성하여 게재한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중동선 소수분에서 학술강습소를 열어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다.

1925년 영안현에서 북만주 무장독립단체가 모여 한인사회 자치기관인 신민부를 결성했다. 이때 그는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참여했다.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 민사부 위원장은 최호였으며 김좌진은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다. 검추는 보안사령관을 맡아 김좌진을 보좌하였다. 신민부는 적극적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김좌진의 군정파와 교육 및 산업 발전을 추구하는 최호의 민정파로 나뉘었는데 군사교육위원장이었던 박영희는 황학수 오상세 김종진 등과 함께 김좌진을 지지했다.

신민부는 길림성 목릉현에 2년 과정의 성동사관학교를 설치하여 지휘관을 양성했다. 교장은 김혁, 부교장은 김좌진이었고, 검추는 오상세 백종열 등과 교관으로 일했다. 신민부는 500여명의 사관을 키워냈다.

검추는 신민부의 보안사령관을 맡아 군사부 위원장인 김좌진과 함께 국내 진입을 위한 공작도 벌였다. 요원들을 파견하여 함경 강원 경상 전라도의 작전지도를 작성하고, 일본 주재소의 위치를 파악했다. 국내에 요원을 보내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며, 북만주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인 해림의 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 처단도 추진했다.

부여군 은산면 박영희 생가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신 영당이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부여군 은산면 박영희 생가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신 영당이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은산면 가곡리 마을 입구의 박영희장군 생가 위치 안내 표지석,
은산면 가곡리 마을 입구의 박영희장군 생가 위치 안내 표지석,

이처럼 광복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며 동분서주했던 검추 박영희는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다. 1926년 김좌진은 군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측근인 검추를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1927년 소련 정보기관 게페우(GPU 정치보안부)에 체포돼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피살됐다. 게페우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으로 스탈린시대 볼셰비키 반대파와 정치범 등을 숙청한 공포정치의 대명사이다. 게페우가 검추를 왜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당시 일본경찰의 정보 보고서는 그가 주거도 없이 중동선 지방을 이리저리 떠돌며 불령운동(일제에 반항 저항하는 행위)을 벌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검추의 곤고한 삶을 짐작케 한다. 늘 김좌진을 돕고 지지했으며, 그의 밀명을 받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순국했다. 나이는 검추 박영희가 7살 아래였지만 김좌진이 죽은 해인 1930년 함께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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