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대호지·천의장터서 최초 민관 합동 항일운동
아산 선장·도고·신창·영인 등 밤낮없이 시위 동참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⑪ 당진 대호지 천의장터, 아산 선장 만세운동
매년 4월4일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과 아산시 선장면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벌어진다. 지역주민과 애국지사 유족, 각계 인사가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것이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돼 충남 서북부 당진과 아산에서 4월4일 같은 날짜에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들 2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지역주민들이 대거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일제 헌병을 공격하는 등 과격해졌고, 사상자도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태형(막대기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 면 직원들이 "도로 정비한다"며 시위대 모아
당진 대호지 천의장터 만세운동은 유생과 면사무소 직원, 천도교도, 농민, 상인 등이 두루 참여한 범지역적 항일운동이었다. 대호지면 소재지에서 인근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행진하여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대호지 천의장터 만세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대호지 만세운동은 의령 남씨 문중에서 비롯된다. 문중에서 도호의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곳의 유생 남주원·남계창·남상돈·남상락 등이 고종의 장례에 참석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보고 돌아와 대호지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여기에 대호지면 면사무소와 송전리 등에 퍼져있던 천도교도가 합세하게 된다.
면사무소는 태극기와 애국가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조직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면사무소에는 면장 이인정, 면서기 민재봉, 강태완, 김동운, 직원 송재만이 근무했다. 면장 명의로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서를 작성하여 각 마을의 구장(이장)에게 배포하고, 집집마다 1명씩 면사무소 앞에 모이도록 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도호의숙의 훈장 한운석이 지은 애국가를 400매 인쇄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4월4일 면사무소 앞으로 주민들이 모여들자 이인정 면장이 나서 "오늘 모인 것은 도로를 고치려는 게 아니라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려는 것"이라고 외쳤다. 남주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송재만이 만세를 선창했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7km 떨어진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했다. 천의장터는 4일과 9일에 장이 섰으며, 정미·대호지·고대면의 주민들이 모이기 용이한 교통의 요지였다.
◇당지 대호지 천의장터 만세운동 참여 애국지사
□ 1200여명 시위 참여, 207명 태형·징역 치러
시위대는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 장정리와 정미면 승산리를 거쳐 천의리에 이르렀다. 천의장터에 태극기를 세우자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들이 모여들어 1200명이나 됐다. 시위대는 헌병주재소와 정미면사무소로 행진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순사들이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권총을 발사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시위대는 격앙했고, 송재만 송봉숙 등은 일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에게 돌을 던지고 구타했다. 주재소의 창문과 게시판도 부쉈다. 일제의 총격으로 시위 현장에서 송봉운과 정천 이씨(이름 불명) 등 3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이튿날일 4월5일부터 홍성 수비대 병력을 지원받아 주도자들을 체포, 서산경찰서로 끌고 갔다. 200여명이 체포됐으며 이달준 박경옥 김도일 3명은 옥중에서 순국했다. 송재만 이인정 한운석 김양칠 이대하 남상락 남상돈 남상집 남상은 홍월성 등 37명이 8월-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태형을 90대 맞은 사람도 90여 명에 이른다 .
대호지 천의장터 4·4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사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당시 대호지면의 가구가 600여 호인데 1200여 명이나 시위에 참여했고 이중 207명이 처벌을 받았다.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은 애국지사도 120명이나 된다. 대호지면의 현직 공무원이 시위에 앞장선 것도 보기 드문 일이고 의령 남씨와 정천 이씨 문중이 적극 참여한 것도 눈에 띈다. 이달준 등 천도교도가 4월8일 재차 만세운동을 벌인 것도 기억해둬야 할 부분이다.
◇아산 선장 만세운동 참여 애국지사
□ 1919년 3-4월 내내 아산 곳곳서 만세시위
충남 아산에서도 1919년 3-4월 선장, 도고, 신창, 영인, 송악, 온양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마을 혹은 면 단위로 학생과 농민, 상인, 노동자, 천도교, 기독교가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됐다. 이 학교 학생들이 3월11일 학교 운동장에서, 12일에는 온양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14일에는 지역민들과 함께 시장에서 만세를 외쳤다. 14일 영인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헌병을 급파하여 14명을 체포했다.
3월31일에는 염치 탕정 배방 송악면 등 아산의 50여 곳에서 횃불이 올라가고 250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염치면 백암리에서는 백암교회의 영신학교 여교사 한연순, 이화학당 학생 김복희가 주민 20여 명과 함께 저녁에 동네 북쪽의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4월2일에는 신창면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 밤 8시경 박진화 신흥남 손천일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순화 등이 읍내리와 오목리 주민 200여명을 이끌고 학성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신창공립보통학교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문을 파괴했다. 헌병대가 총을 쏴 시위대를 해산하고 15명을 체포했다.
아산의 대표적인 항일 운동인 선장독립만세는 4월4일 벌어졌다. 정수길 임천근 등은 서울의 3.1만세운동에 부응하여 선장면에서도 만세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은 선장 장날 지역주민 200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에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깨뜨렸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주재소는 온양의 보병 80연대에서 7명을 지원받아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이로 인해 선두에서 만세를 외치던 최병수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7명이 부상을 당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오상근 김천봉 5명이 체포돼 모두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 외에도 만세운동에 참가자 중 52명은 태형 60대, 57명은 태형 40대를 맞았다.
□ 선장면 헌병주재소 공격, 114명 체포 처벌 받아
선장 만세운동의 사망자가 1명, 체포돼 처벌받은 사람이 114명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참가자는 재판기록에 나오는 200명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위를 주도했던 천도교도 정수길 애국지사는 훗날 1926년 6.10 만세운동과 1927년 신간회에 참여했고, 1938년에는 천도교의 멸왜기도운동을 이끈 혐의로 체포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외에도 아산의 온양면에서 4월 3-19일 사이에 4차례, 송악면은 4-25일 5차례, 영인면은 15-23일 2차례, 도고면에서도 11-25일 9차례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3월 중순에서 4월 말까지 아산에서는 만세 시위가 계속된 것이다. 1919년 아산에서는 만세운동과 관련 순국자 1명, 징역형 22명, 태형이 266명에 이르는 등 290여 명이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당진 대호지 천의장터와 아산 선장, 신창면 등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된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됐음을 잘 보여준다. 모든 백성의 가슴에 대한독립의 열망이 살아 있었고, 한곳에서 불씨를 놓자 온나라로 그 불길이 훨훨 퍼져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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