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⑧ 진천 광혜원·음성 소이면 만세운동
비폭력 불복종 평화적 시위, 폭력·전투적 투쟁으로 바뀌어
박도철 열사, 어머니와 함께 같은날 순국 등 비극 잇따라
사망·부상 등 애국지사들 기록 정확하지 않아 큰 아쉬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4-5월에도 계속됐다. 농어촌의 면 지역까지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충북에서도 괴산 진천 옥천 영동 청주 음성 충주 등 곳곳에서 학생 농민 노동자 상인 여성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펴낸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충북에서 84회의 시위가 일어났고, 참가자는 최소 3만6338명-최대 4만5328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충북학연구소에서 펴낸 '충북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에 따르면 충북에서는 3·1운동으로 99명이 죽고, 부상자 210명, 수감자는 157명으로 나타났다.
충북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진천군 광혜원과 음성면 소이면의 한내장터 시위다. 지역주민들이 다수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일제 관리와 헌병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됐고, 일본 헌병대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에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라"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매우 과격해졌다. 비폭력 불복종의 평화적 시위가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뒤섞이면서 폭력적 전투적 투쟁으로 바뀐 것이다.
충북 진천에서는 3월 15일 진천읍을 시작으로 이월, 백곡, 광혜원면(당시 만승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가장 치열했던 광혜원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2-3일 이틀 동안 전개됐다.
□ 식목행사, 광혜원 장날 연 이틀 시위
광혜원 만세는 윤병한이 이끌었다.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일했던 그는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나섰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진천으로 귀향했다. 농민계몽활동을 벌이던 윤병한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천읍의 이상직과 함께 진천군 전역에서 집회를 벌이기로 약조한다.
윤병한은 정관옥 오은영 등과 함께 광혜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거사 날짜를 4월 2일로 잡았다.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회죽리의 산에서 나무를 심는다는 구실로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4월 2일 오후 식목 행사에 모여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호응하여 정운화 남계홍 백선옥 이영호 신달용 등 동네 주민 200여 명이 동참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서기들에게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요구했다. 직원들이 불응하자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괭이와 몽둥이로 유리창을 깨뜨렸다. 헌병주재소 신축 공사장에 진입하여 벽과 문을 부수고 건축재료인 석회를 뿌려 없앴다. 윤병한은 다음날에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이날 밤 면사무소 직원으로 하여금 그 취지를 담은 글을 20매 인쇄하여, 시장거리에 붙이게 했다.
광혜원 장날인 3일에도 시위가 계속됐다. 12시경 음성과 죽산에서도 주민들이 몰려들어 2000여 명이나 됐다. 시위대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헌병주재소로 나갔다.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인 이리에 헌병분견소장은 진천읍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병력이 늘어난 헌병대가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시위대가 아랑곳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자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했다. 순식간에 1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순국자는 이치원 김경윤 윤광옥 김득손 김예원 구씨 등이다.
□ 박도철 열사, 어머니와 함께 같은 날 순국
특히 이날 모자가 한 곳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대 일원인 박도철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던 그의 어머니까지 일제의 총격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그동안 박치선(혹은 유치선)으로 알려졌던 박도철 열사는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인적사항이 밝혀져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광혜원 만세운동을 주도한 윤병한은 징역 3년, 정운화 남계홍 백선옥 이영호 신달용은 각각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진천군 광혜원에서 이처럼 격렬한 만세운동이 펼쳐졌지만 이를 기리는 흔적은 아무 것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광혜원만세운동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출범, 사료 발굴과 기념탑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음성군에서도 3-4월 음성읍, 삼성, 맹동, 감곡, 대소, 금왕, 원남, 소이면 등에서 만세시위가 계속 벌어졌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소이면 한내장터 만세운동이다.
한내장터 시위는 김을경이 주도하고 이중곤, 권재학이 가세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한내장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주도자들은 4월 1일 오전 11시경 장터로 나와 지금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호응하여 장을 보러 나온 지역주민과 상인 등이 함께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김을경이 면장을 끌어낸 뒤 "너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 불응하면 죽이겠다!"고 압박했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면장은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 규모가 1000여 명에 이르렀을 무렵 일본 경찰들이 출동,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불응하며 계속 만세를 부르자 김을경과 이중곤을 끌고 갔다. 곧바로 시위대는 권재학의 지휘에 따라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용호가 공격을 외치자 성난 시위대는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부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일제는 충주의 일본군 수비대 병력을 급파했다. 오후 3시경 소이면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모자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렬 이태수 등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한내장터 시위를 주도했던 김을경은 징역 1년 6개월, 이중곤 권재학은 1년, 추성렬 이교필은 6개월을 받았다. 이용호는 태 90대에 처해졌는데 고문과 태형의 여독으로 2020년 3월 12일 31세로 숨졌다.
□ 순국·부상 애국지사 기록 부재 안타까워
다행스럽게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에 한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역주민과 애국지사 유족들이 돈을 모아 3.1만세사적비를 세웠다. 사적비에는 한내장터 만세운동의 경과와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 이용호 추성렬 이교필 안창렬 안인흥 안효량 이태수 유치수 권중전 박기범 서홍기 피춘호 성명미상(3인) 등의 애국열사 이름이 적혀 있다.
진천군 광혜원과 음성군 한내장터 만세운동은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 거의 전적으로 일제에 체포됐던 애국지사의 재판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 사망자나 부상자에 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일제에 항거하는, 죄질이 불량한 식민지 백성일 뿐이었던 것이다. 붙잡힌 애국지사를 엄벌하여 다시는 이런 일어나지 않도록 일벌백계하는 것만 중요했던 것이다.
광혜원과 한내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 중에 인적사항과 공적이 알려진 것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하다. 사망자와 부상자 숫자조차 정확하게 정리돼 있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소중한 목숨을 잃거나 부상한 애국지사 대부분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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