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출신의 의병장 청암 한봉수는 매우 독특한 항일 독립투쟁가이다. 이 땅에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을미의병, 1905년 을사늑약에 분노하여 을사의병, 1907년 고종의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대개 유림이나 전직 관료와 군인이 병사를 모으고 부대를 편성, 지방의 주요 도시와 성을 공격했다.한봉수는 기존의 의병과는 전혀 다른 전술로 전투를 벌였다. 많은 군사를 모아 부대를 이끌고 전면전을 벌인 게 아니라 상황과 지형에 따라 서너명 혹은 수십명 단위로 부대를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비롯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나라의 기틀을 세운 사람, 국난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을 5등급으로 나눠 훈장을 주는 것이다.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는 61명으로 순수한 독립유공자는 30여 명이다. 이시영 김좌진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승만 등이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 6.25 전쟁 때 한국을 도운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와 해리 트루먼, 1960년대 차관을 줘 한국의 산업화를 도운 독일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등 외국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들이 많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만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망국에 분노하여 단식을 하다가, 옥중에서 고문에 못이겨 병사한 애국지사도 있다. 많은 죽음 중에 신팔균 임수명 부부의 죽음 만큼 만큼 비통한 사례가 없다. 독립운동을 하다 두 부부가 갑작스럽게 순국했을 뿐 아니라 자녀들도 셋이나 목숨을 잃었다.신팔균은 1988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원적지와 생활 근거지는 충북 진천이다. 진천 이월면 일원에는 평산 신씨가 많이 살았고, 집성촌도 있었다. 신팔균의 호는 동
일제강점기 충북의 자진순국자일제 침략 시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진순국자가 전국에서 잇따라 나타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과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시행되자 경기도 양주의 이봉환이 자결했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 민영환을 비롯 이한응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이 자진순국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택했다. 1910년 강제 한일병합이 이뤄지자 황현 이범진 이재윤 등이 목숨을 던졌다.충북에서도 13명
일제강점기 많은 유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제와 서구의 조선 침략은 500여년 주자학적 질서 속에 살아온 유림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외세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일제 침략에 맞설 대안을 찾는데 혼란스러워했다.유림의 거두 유인석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죽이는 변란이 일어나자 '처변삼사(處變三事)'라는 3가지 방도를 제시했다. 첫째가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둘째가 물러나서 옛것(유교의 도통)을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셋째가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치명수지(致命遂志)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을 한 세력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종교계이다. 천도교(동학)는 3.1운동을 주도하고, 6.10만세운동과 멸왜기도운동을 벌였으며, 전북 정읍에 본소를 둔 보천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도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종교는 독립운동가인 홍암 나철(나인영)이 1909년 서울에서 시작한 종교이다.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던 나철은 거사에 실패한 뒤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를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대종교 서일과 채오 등은 만주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 매우 조직적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1907년 '자신회'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구축하여 자금과 총기를 확보했고, 결사대를 꾸려 암살을 시도했다. 비록 실패하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사형을 받거나 형을 치렀지만 일제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자신회 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은 30여명 중 13명이 충청 출신이다. 금산 진산 회덕 옥천 보은 출신의 애국지사가 을사5적과 매국노를 처단하는 거사에 참여한 것이다.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제2차한일협약
한훈은 평생 항일 의열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애국지사 대부분이 처음에 민족계몽이나 실력양성 운동을 벌이다가 무장투쟁에 나섰지만 그는 초지일관 친일 관료와 경찰, 일제 고위관료를 처단에 몰두했다. 친일 부호와 악질 인사를 죽이거나 겁박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년 6개월이나 옥살이를 했지만 한 번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한훈은 1890년 충남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에서 아버지 한성교와 어머니 창녕 성씨 사이에서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한우석으로 형 한태석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한훈은 17세 때 형과 함께 홍
평생 독립운동을 한 인물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꽤 많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치열하게 살다갔지만 너무 일찍 죽거나, 그 업적이 묻히거나, 저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충남 계룡 출신의 항일 무장 독립투쟁가 하산 양기하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양기하는 1878년 충남 계룡시 두마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산이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처럼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양인원 임창주 등의 이름도 사용했다. 집안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별로 전하는 게 없다.하산은 대한제국 시절 공주군수로 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로 나라가 망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 강압통치를 하던 때였다. 월남 이상재가 미술단체 행사에 갔는데 마침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도 와있었다. 월남이 비위가 상해 "대감들도 도쿄로 이사를 가시지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어리둥절하여 "별안간 무슨 말씀이오?"라고 물었다. 월남은 태연히 "대감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 아니요? 도쿄로 이사 가면 일본도 망할 거 아니겠소!"라고 쏘아붙였다.월남 이상재는 재미 있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일제 강점기 항일의 걸으며
◇김종진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아나키스트들김종진은 1927년 10월 하순 북만주 하이린(해림)에 도착, 김좌진을 만났다. 홍성 출신의 6촌형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북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 결성한 신민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김종진은 이달 김야화 등과 독립운동 단체인 흑우회를 조직, 아나키즘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민족해방운동의 기본계획)을 작성하여 김좌진에게 내놓았다. 아나키즘에 기반한 경제공동체와 농촌자치조직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자는 내용
김종진의 삶을 좇다보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의 믿는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머나먼 중국의 하이린(해림)에서 그것도 누군가에게 납치돼 종적도 모른 채…. 어떤 생각으로 만주에서 아나키즘 사회를 만들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 했을까? 과연 그게 실현 가능하다고 여겼을까? 독립운동가들은 왜 그리 이념과 사상에 몰두했을까?시야 김종진은 1901년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부친 영규와 어머니 청송심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산리전투를 이끈 백야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양반 집안이지만 가세는 평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에 있는 정자의 주석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책에 먹칠을 할 만큼 매우 똑똑했다. 14세에는 부친의 뜻에 따라 전정숙과 혼인을 했다.1896년 김복한 등이 주도한 홍주 을미의병을 겪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장투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8세쯤 만해는 부모에게 아무 말도 않고 노자 한푼 없이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 한반도에서는 3차례에 걸쳐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맨먼저 일어난 을미의병은 1895년 단발령을 내린데 분노하여 일어났고, 을사의병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게 발단이 되었다.충북 제천에서는 을미-을사-정미년에 쉼 없이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을미년에는 유인석의병, 을사년에는 원용팔 정운경의병, 정미년에는 이강년의병이 제천을 교두보로 일제와 싸웠다. 20여 년에 걸쳐 유생과
유자명은 '숨은 인물' '배후 인물' 같은 독특한 독립운동가이다. 광복을 위해 의열단과 아나키스트 운동,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열렬하게 일했지만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빼어난 실력을 갖춘 이론가로서 널리 소통하고 아우르면서 치밀하게 매사를 추진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비밀스럽게 기획하고 준비하고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유자명은 1894년 충주시 이안면에서 태어났다.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 입시에 실패했지만, 서울에서 1년 공부한 뒤 1913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수원농림학교
충북 청주의 고령 신씨 문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청주지역의 고령 신씨 독립유공자만 해도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 신홍식 신건식 등 16명에 이른다.◇충북 청주의 고령 신씨 문중충북 청주시 낭성 가덕 미원면 일원에는 16세기 초부터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이 세거해왔다. 청주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 하여 '산동 신씨'라고 불렀다. 이 문중은 19-20세기 일제와 서구 여러 나라가 물밀 듯이 한반도에 들어오던 시기 매우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대응에 나선다.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 들이기로 한
1919년 단재 신채호는 3.1운동 소식을 듣고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국내와 중국, 만주, 러시아, 미국에서 상하이에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국회)을 구성하고 나라 세우기(건국)에 나섰다. 4월 10일 무기명 비밀투표로 29명의 의정원 의원을 뽑았는데 단재도 여기에 포함됐다. 임시의정원은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했으며, 최초의 헌법인 임시헌장을 채택, 공포했다.첫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총리선임을 싸고 갈등이 불거졌다. 일각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제안하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의 명언들이다. 그가 지은 총론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단재는 여기서 "역사는 무엇이뇨? 일개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니, 곧 아와 비아의 투쟁이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적었다. 또한 "역사를 존중하는 민족은 살고, 역사를 경홀(소홀)히 하는 민족은 망하나니라."라고 주장했다.단재는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 교육자, 문학가, 혁명가 등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늘 궁핍하게
당시 상하이는 세계 각국이 조계를 설치하고 무역활동을 벌이는 동서양 문물의 용광로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넘치는 국제도시였다.예관은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쑨원 등 중국혁명동맹회 간부들과 교류하게 된다. 예관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신규식과 교류한 중국의 혁명가들예관은 혁명가들이 '만권보'를 발행할 때 망명자금으로 가져갔던 돈을 희사했다.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11년 우창봉기와 상하이봉기에 동참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했으며, 쑨원이 초대 임시
말쑥한 양복 차림에 까만 색안경, 카이젤 수염…. 한쪽을 흘겨보는 듯한 독특한 얼굴….여느 독립운동가와는 사뭇 다른 예관 신규식의 이미지이다. 겉만 보면 평안하고 모던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격정적이고 치열하게 살았고 43년의 일생을 모두 조국광복에 바쳤다. 인생의 궤적을 좇다 보면 그가 대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아주 큰 인물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신규식은 1880년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주시 동쪽의 낭성 가덕 미원면에는 고령신씨가 500년에 넘게 세거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