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변, 충청의 독립동가와 그 발자취
40) 충북 진천, 신팔균 임수명 부부
육군무관학교 졸업… 일제감시 중국 망명
임정개혁 내세운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여
아내와 자녀 등 일가족 5명 비극적인 종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들이 많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만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망국에 분노하여 단식을 하다가, 옥중에서 고문에 못이겨 병사한 애국지사도 있다. 많은 죽음 중에 신팔균 임수명 부부의 죽음 만큼 만큼 비통한 사례가 없다. 독립운동을 하다 두 부부가 갑작스럽게 순국했을 뿐 아니라 자녀들도 셋이나 목숨을 잃었다.
신팔균은 1988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원적지와 생활 근거지는 충북 진천이다. 진천 이월면 일원에는 평산 신씨가 많이 살았고, 집성촌도 있었다. 신팔균의 호는 동천(東川)으로 1920년대 대일본 무력투쟁에서 용맹을 떨쳐 지청천 김경천과 더불어 '남만주의 삼천'이라고 불렸다.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명문가로 조부인 신헌은 삼도수군통제사와 병조판서, 부친 신석희는 병마절도사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동천은 무인가문의 후예답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1902년 참위(소위)가 됐고 이듬해 학교를 마쳤다. 독립운동가 조성환과 신규식이 무관학교 동기이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될 무렵에는 부위(중위)로 진위보병 7대대와 황실 근위보병 1대대에서 복무했고, 1909년 보병 정위(대위)가 됐다.
동천은 1909년 하반기 진천으로 낙향했다. 군대가 해산되고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입신양명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동생인 신가균 신필균과 문중의 도움을 받아 이월면에 보명학교를 세우고 교육운동에 나섰다. 그의 명의로 돈을 빌리고 갚는 등 학교를 실질적으로 책임 운영했다.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단에도 참여했다. 1909년 1월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서상일 신백우 등이 설립한 단체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 연락기지 운영, 자금 지원 등을 펼쳤다.
일제가 대동청년단 사건과 관련 감시의 눈길을 보내자 해지자 1914년경 중국으로 망명, 만주와 북경, 상하이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8년 봄 길림에서 대종교와 대한독립의군부가 주도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김교헌 김규식 이동녕 이동휘 이세영 이승만 박용만 김좌진 등 39명이 참여했는데, 이 문서의 신정(申楨)이 신팔균이라고 한다. 이 무렵 서로군정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이세영 이장녕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의 전문성을 살려 훗날 청산리전투 등에서 싸운 우수한 군인을 키워냈다.
3.1운동 이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1920년경 북경고려공산당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1922년에는 항일 무력투쟁을 추진하기 위한 군인구락부에도 참여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때 동료였던 이세영 황학수 조성환 등과 한교교육회를 설립하여 간도참변으로 고아가 된 자녀를 도왔다. 모금운동을 벌여 향산 부근에 학교를 세우고 끼니를 제공하고 공부를 시켰다. '간도참변'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고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자, 일제가 그 보복으로 1920년말-21년초 한인교포 35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23년에는 박용만 최동오 등과 북경한인구락부를 설립, 한인교포 2세들을 위해 구호와 교육활동을 벌였다.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이 합심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창립된 중한호조사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관련 국민대표회의에서도 활동했다. 1923년초 임정은 독립운동을 방향을 싸고 새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 조금 손을 보자는 개조파, 현상 유지파로 갈라져 싸웠다. 동천은 박용만 등과 창조파의 일원으로 임정의 외교론과 실력양성 노선을 비판하고 기존의 임시의정원(국회) 해체를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부로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헌법을 발표했는데 동천은 이때 33인의 국민위원에 선임됐다. 이 조직의 집행부인 한인위원회는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와 합병하고, 박용만을 국무집행위원장에 선임했다. 연해주와 남북만주 관할하는 행정구와 군관구가 설치됐는데, 동천은 군무위원장으로 선임돼 5개의 군구(軍區)를 맡았다.
1922년 초 간도참변 이후 서북간도에서는 독립군 통합운동이 일어나 대한통군부가 결성됐고, 8월에는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광복군총영 등이 합세하여, 통군부가 대한통의부로 확대됐다. 그러나 황제의 복원을 바라는 복벽주의자와 민주제도 도입을 희망하는 공화주의자들의 갈등으로 복벽주의 인사들이 1923년 2월 대한의군부를 설립하여 빠져나갔다.
통의부는 조직 안정을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에게 육군주만참의부라는 조직으로 승인받았다. 통의부는 1924년 1월 조직을 개편하고, 동천에게 군사위원장을 맡겼다. 동천이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자 의용군 장교들이 신망 있는 인물을 사령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통의부 수뇌부는 비상회의를 열고 동천을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사령장으로 의결했다.
동천은 중책을 맡자마자 기존의 병력에 청장년을 모집하여, 5개 중대의 의용군을 조직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산악으로 가서 훈련을 실시했다. 전투경험자들이 빠져나가고 신병으로 채워진 부대의 전력강화가 시급했던 것이다.
동천의 부대는 1924년 7월 2일 싱징현 왕칭먼 2도구에서 산악훈련을 할 때 중국군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그는 부대원들을 후퇴시키기 위해 싸우던 중 가슴에 관통상을 당했다. 중대장 김하석이 업고 탈출했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죽는 순간 동천은 "압록강을 건너가 왜놈들과 싸우다 죽으려 했는데, 애매한 중국사람들과 싸우다 죽는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최근 연구결과(충북대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이사건은 일본 사이또 총독 암살 미수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됐다. 1924년 5월 독립군부대의 하나인 참의부가 압록강변을 시찰하는 일본의 사이토 미노루 총독을 저격, 실패한 바 있다. 이에 일제는 만주군벌 장쭤린에게 독립군을 토벌하라고 압력을 가했는데 이때 출동한 장쭤린 군대가 우연치 않게 통의부 의용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동천이 통의부 최고 군사 지휘자가 되어 항일 무장투쟁의 불꽃을 피우려던 찰나 불의의 공격으로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2년 동천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키우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아내 임수명도 4개월 뒤 세상을 떴다. 그녀 역시 국내와 만주, 베이징, 상하이를 오가며 비밀문서 전달과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한 애국지사였다. 동천이 순국할 당시 베이징에서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인들이 주선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먹고 살길이 막연하여 아들 하나는 친척에게 맡겨두고 막내 딸을 낳은 채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의 순국 소식이 전해졌고, 병석에 있던 셋째 아들마저 숨을 거뒀다. 절망한 임수명은 갓 출산한 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팔균의 전처 김씨 소생인 장남 신현충도 6년 뒤 세상을 떴다. 현충은 국내에서 아버지와 계모, 이복동생들의 상을 치른 뒤 독립운동을 위해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산서의 북방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치료가 어려운 림프절 결핵을 앓았는데 1930년 7월 산서성 태원을 여행하던 중 고통을 견디다 못해 분수(황하의 지류)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동천의 가족사는 너무 아프고 처절하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온 가족이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고통을 겪었고, 아내와 자녀 3명 등 5명이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숨졌다. 하늘이 늘 자애롭고 공평하지는 않는 듯하다. 때로 터무니 없이 잔인하고 모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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