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발자취
(28) 제천 의병
단발령 계기, 유생·포군·지역민 함께 거병
충주성 점령… 충청·강원·경북 장악 활약
친일·의병 토벌 관찰사 3명, 군수 6명 처단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 안의 자양서사. 의병장 의암 류인석이 제자들과 투쟁방안을 논의한 곳으로, 현판은 유인석이 쓴 글씨이다. 김재근 선임기자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 안의 자양서사. 의병장 의암 류인석이 제자들과 투쟁방안을 논의한 곳으로, 현판은 유인석이 쓴 글씨이다. 김재근 선임기자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 한반도에서는 3차례에 걸쳐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맨먼저 일어난 을미의병은 1895년 단발령을 내린데 분노하여 일어났고, 을사의병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게 발단이 되었다.

충북 제천에서는 을미-을사-정미년에 쉼 없이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을미년에는 유인석의병, 을사년에는 원용팔 정운경의병, 정미년에는 이강년의병이 제천을 교두보로 일제와 싸웠다. 20여 년에 걸쳐 유생과 농민, 포군, 지역주민들이 뭉쳐 인근의 충북 경북 강원 여러 고을을 아우르며 무장투쟁을 벌인 것이다.

을미년 제천의병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제천의병 기념탑.
을미년 제천의병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제천의병 기념탑.

제천의병을 대표하는 것은 유인석이 주도한 을미의병이다. 일제는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죽였고,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백성들은 크게 놀랐고 유생들은 주자학적 전통과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당시 제천 봉양읍 장담은 이항로의 문하 화서학파의 근거지로 이름이 높았다. 이항로의 제자 성재 유중교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렀고, 성재 사후 의암 유인석이 강학을 하며 학맥을 잇고 있었다.

유인석이 화서학파의 제자들 가르치며 살았던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단의 고택. 김재근 선임기자
유인석이 화서학파의 제자들 가르치며 살았던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단의 고택. 김재근 선임기자

제천의병은 경기도 지평(양평)의 유력 가문 이춘영의 거병에서 시작됐다. 이춘영은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했고, 고종과 가까운 김하락이 이끄는 경기도 이천의 의병에 가담했다. 이춘영은 김하락과 연계하여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지평의 유림인 안종우를 설득, 동참을 이끌어냈다. 지평현의 포군(砲軍) 지휘자 김백선과 그의 수하 포군 100여 명을 영입했다.

 

◇을미년 제천의병에 참여한 의병장

이춘영(왼쪽부터), 이강년, 서상렬 ,안승우, 이소응, 유인석
이춘영(왼쪽부터), 이강년, 서상렬 ,안승우, 이소응, 유인석

이춘영이 화서학파 우두머리인 의암 유인석을 찾아 거의를 호소하면서 제천 유생의 을미의병 참여가 시작됐다. 의암은 화답하여 안승우를 보내 이춘영을 돕게 하고, 서상렬 이필희 이범직 등 소장 강경파를 합세하게 했다. 의암은 동문 사제인 춘천의 이소응에게도 동참을 권유했다.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주자와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등의 영정을 봉안한 자양영당이 있다.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주자와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등의 영정을 봉안한 자양영당이 있다.


1월 12일 이춘영 의병이 김백선 부대를 앞세워 원주 관아에 진격하자 군수 이병화는 충주관찰부로 도망했다. 이춘영은 단발령을 강행한 친일 관리들을 타도한다며 병사를 모집한 뒤 제천으로 진출, 김익진 군수가 도망친 관아를 무혈 점령했다.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건립된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건립된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을 점령한 의병은 화서학파의 이필희가 대장을, 이춘영은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중군장을 맡았다. 의병은 단양으로 나아가 군수 권숙을 생포했다. 이에 개화파 정부는 선유사를 파견하고, 친위대 1개 중대를 보냈으나 의병부대가 진회협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부대 안에 병력의 열세를 의식한 회의론이 확산돼 일부 병사가 도망하고 군기가 무너지는 등 혼란이 빚어져, 대장 이필희가 군권을 이춘영에게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유인석은 위급한 상황을 살펴보고 제자들에게 영월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충북과 강원 영서 일원에서 장수들이 군사들을 모아 속속 영월에 도착, 병력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병사들이 지휘관들을 업신여기고, 유생 출신 장수들의 명망과 실력이 엇비슷해 위계와 통제가 바로 서지 못했다.

의병세력은 결국 화서학파의 우두머리인 의암에게 대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의암은 능력 부족과 모친상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제자들의 거듭된 요청에 2월 7일 의병장에 올랐다. 유인석은 의병을 5개 부대로 편제하고, 군사에 서상렬 주용규, 참모 이필근 박주순,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 좌군장 원규상, 우군장 안성해, 선봉장 김백선, 소모장 서상렬, 진동장 이필희, 유격장은 이만원으로 임명했다. 주용규로 하여금 (격고팔도열읍)과 (격고내외백관)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의 백성과 관리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의암은 '복수보형(復讐保形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상투의 전통을 지킨다)'을 기치로 내걸었고, 취임 직후 내부의 첩자 4명을 찾아내 처형하여 통제권을 확립했다.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체포, 단발을 강요하고 의병을 토벌한 죄를 물어 처단했다.

유인석 의병은 행정 군사 문화 중심지인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2월 17일 1만여 명의 의병부대는 별다른 전투 없이 충주성에 무혈입성했다. 단발령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데다, 충주성의 군사 상당수가 이미 의병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의병은 관찰사 김규식을 처형하여 목을 내걸었다. 제천의병의 영향권 아래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이 죽음을 당했고, 춘천관찰사 조인승은 이소응 의병에 의해 처단됐다.

영남의병과 공동전선도 구축했다. 유인석은 소모토적대장 서상렬을 안동에 보내 경북의 의병과 공조토록 했다. 제천 안동 선성 봉화 영주 순흥 풍기 7개 군의 제천-경북 연합군이 함창 태봉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경북연합의진은 안동 관찰사 김석중, 예천군수 유인형, 의성군수 이관영, 영덕군수 정재관을 처형했다.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돼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제천의 마을. 사진=제천시청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돼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제천의 마을. 사진=제천시청
일본군이 파괴한 농가. 사진=제천시청
일본군이 파괴한 농가. 사진=제천시청

의병이 충주성을 점령하자 관군과 일본군이 곧바로 반격해왔다. 인근 고을을 관할하는 관아(도청)를 빼앗긴데다 관찰사(도지사)까지 죽음을 당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충주성 장악 이후 안팎의 환경이 악화되면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일본군과 관군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계속 공격해왔고, 아관파천으로 들어선 친러정부는 단발령을 철회한 뒤 전국에 관리를 보내 의병해산을 종용했다. 의병부대는 병사들이 빠져나가 군세가 위축된 데다 식량과 화력 부족에 직면했다. 화서학파와 함께 의병을 이끌었던 친정부(고종) 세력이 이탈했고, 유생과 평민 의병 사이에 갈등까지 불거졌다.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방어하면서 요충지를 장악한 가흥과 수안보의 일본군과도 싸워야 했다. 3월 18일 가흥과 수안보전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무너졌다. 화력의 열세와 지원체계의 균열이 패배를 부른 것이다. 이후에도 의병은 계속 패했다.

조정은 4월 중순 장기렴의 관군을 보내 제천의병 토벌에 나섰다. 장기렴은 왕이 해산을 명했다며 병사들을 회유하고 유인석에게도 해산을 요구했다. 관군과 의병은 한달 넘게 명분을 놓고 논쟁을 벌였고, 해산이 무산되자 관군은 충주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 3개 중대의 공격에 치열하게 맞섰으나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이춘영과 주용규가 전사했다.

제천의병은 제천으로 후퇴, 안승우를 중군장에 임명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영춘에서 권호선,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 강원도 운주에서 한동직과 이인영, 횡성에서 이명로의 군대가 합류했다. 그러나 선봉장 김백선 처형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기가 급락한다. 평민 출신 김백선이 앞선 전투에서 안승우 부대가 지원을 거부한 것에 대해 칼을 들고 항의하자 유인석이 군기문란죄로 처형한 것이다. 맹장 김백선이 죽자 많은 병사들이 군진을 이탈했다.

제천의병은 제천 남산전투에서 패배,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관군과 일본군은 5월 23일부터 맹렬하게 공격했다. 의병은 읍내에서 격렬하게 싸워 한때 우세를 점했으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화승총을 발사하지 못해 패배하고, 남산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여기서도 압도적 화력을 가진 적에게 패했고, 중군장 안승우까지 총에 맞아 숨졌다.

제천의병 초기에 대장으로 활동했던 이필희의 묘소.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제천의병 초기에 대장으로 활동했던 이필희의 묘소.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충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주용규의 묘소도 대전현충원에 있다.
충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주용규의 묘소도 대전현충원에 있다.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이만원의 묘소. 유인석의 을미의병과 이강년의 정미의병에 참전했다.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이만원의 묘소. 유인석의 을미의병과 이강년의 정미의병에 참전했다.

유인석은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강원과 경기도를 전전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계속 패했고, 결국 망명 투쟁을 위해 강원-황해-평안도를 지나 압록강 건너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8월 29일 중국관헌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유인석 등을 제외한 219명이 귀국길에 올랐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은 충청과 강원 영남의 관찰사 3명과 군수 6명을 처단, 일제와 친일관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훗날 항일 무장투쟁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을사년에 단양과 제천을 기반으로 정운경과 원용팔 의병이 일어났고, 정미년 문경에서 일어난 이강년의병도 제천의병을 자처했다. 제천의병의 도도한 물결은 영남 강원 경기 서북 지방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중국과 소련의 망명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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