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⑫ 청양 정산, 서천 마산 만세운동
청양 정산 만세운동 순국자 11명
서천 마산 시위대 경찰건물 완파

충남 청양군 정산면 소재지에 조성된 정산 3.1만세운동 기념탑. 사진=청양군
충남 청양군 정산면 소재지에 조성된 정산 3.1만세운동 기념탑. 사진=청양군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면서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다. 학생과 천도교 기독교 노동자 상인 유생을 비롯하여 관리와 어린이 기생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고 시위대가 수천 명에 이르면서 점차 과격해졌다. 일제 헌병과 관리를 공격하고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했다. 급기야 일제가 시위대를 폭행하고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 학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평남 강서, 경남 사천·밀양·합천, 평남 맹산, 평북 정주, 수원 제암·고주리, 경기 화성 화수리, 천안 아우내(병천) 등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수십-수백 명이 희생됐다. 수많은 애국지사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초등학교 옆에 세워진 서천 3.1운동 기념비. 김재근 선임기자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초등학교 옆에 세워진 서천 3.1운동 기념비. 김재근 선임기자

□ 700여명 헌병주재소 몰려가 연행자 석방 요구

충남 청양 정산 만세운동도 희생이 컸다. 1919년 4월 청양읍과 정산 화성 운곡 청남 비봉 장평면 등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지역민들은 주로 장날을 이용하여 햇불을 올리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정산 만세운동은 홍범섭 등의 주도로 시작된다.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은 1919년 3월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 임창순 임철재 김세환 김필현 윤구학 이건호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만세운동을 제안했다. 이들은 4월 5일 정산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청양 정산 만세운동 애국지사

홍세표 (징역 1년)(왼쪽부터), 김세환 (태 90대) , 임창순 (태 90대). 사진=국가보훈부
홍세표 (징역 1년)(왼쪽부터), 김세환 (태 90대) , 임창순 (태 90대). 사진=국가보훈부

5일 오후 3시경 정산시장에 도착한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장을 보러나온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무리를 지어 시장을 순례했다. 정산 헌병주재소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시위대 30여 명을 연행해갔다. 7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헌병대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석방을 요구하자 일제는 공포탄을 쏘며 해산을 요구했다, 이때 향교 직원 권흥규가 시위대 맨 앞에서 옷고름을 풀어 헤친 채 "쏠테면 쏘라!"며 외치다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김필현도 총탄을 3곳에 맞고 부상을 당했다.

정산 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권흥규지사 순열비. 조카딸도 숨졌고, 딸도 중상을 입었다. 사진=국가보훈부
정산 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권흥규지사 순열비. 조카딸도 숨졌고, 딸도 중상을 입었다. 사진=국가보훈부


□ 권흥규 현장 순국… 조카딸 사망, 딸은 중상

4월6일 순국한 권흥규의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시위대는 거적에 덮인 권흥규 열사의 시신을 인수한 뒤 목면 안심리 자택으로 운구하면서 길목마다 노제를 지냈다. 권영진이 쓴 '배일사 권공지구(排日士 權公之柩)' 명정을 앞에 세우고 만장이 뒤따랐다. 약 6km에 이르는 과정에 1000여 명이 길에 서서 만세를 불렀고, 정일택이 만든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배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들이 목면 안심리 여우고개에 이르렀을 때 매복해 있던 청양 헌병과 공주에서 파견된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했다. 권흥규의 조카딸과 최윤안 유행길 장응렬 윤광원 김국삼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권흥규의 어린 딸도 손가락 4개가 잘리고 볼에 총탄이 스쳐 불구가 되었다.

4월7일 권흥규 열사의 시신을 안심리에 안장하는 날에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날 저녁 와촌리와 내초리 주민 5백여 명이 산 위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헌병이 총을 쏘며 난리를 쳤다.

정산 만세운동으로 4월5일 현장에서 권흥규 의사가 피살됐고, 시신을 운구하면서 6명이 숨졌으며, 권영진 장광열 최상운 권인필이 옥중에서 사망하는 등 순국자가 11명에 이른다. 권흥규의 딸과 김현필 윤구학이 부상했으며, 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은 재판을 받고 1년형을 치렀다, 태형을 70-90대 맞은 사람도 정산면 147명, 목면 40명, 장평면 1명 등 188명이나 된다. 충청권에서는 천안 아우내(병천) 만세운동에 필적할 만큼 만세운동의 열기도 뜨거웠고 희생도 컸다.


□ 서천 마산 만세운동 애국지사

송기면 (징역 1년 6월)(왼쪽부터), 정일창 (징역 3년), 이승달(징역 3년), 이근호 (징역 1년). 사진=국가보훈부
송기면 (징역 1년 6월)(왼쪽부터), 정일창 (징역 3년), 이승달(징역 3년), 이근호 (징역 1년). 사진=국가보훈부

 

□ 한영학교 출신 기독교도들 시위 주도

1919년 3월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 재판 기록에 "(시위대가) 경찰 출장소에 돌을 던지고 혹은 장지문과 기물 등을 파괴했으며, 연행하여 유치 중인 6명을 탈환해가고, 출장소의 기둥과 지붕만 남겨놓고 모두 파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위대가 출장소를 공격하여 연행자를 탈취해갔으며 건물을 거의 완파했음을 알 수 있다.

마산면 신장리 만세운동은 기독교도인 송기면 송여직 형제 등이 주도하여 시작됐다. 송기면은 기독교계 독립운동가 김인전이 세운 화양면의 한영학교를 다니며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영학교 출신의 기독교도인 유성렬 이근호 임학규 이동홍 노형래 하중호 유일동과 신장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의 형 송여직도 여기에 참여했다. 송기면과 송여직 형제는 23일-27일 집에서 태극기를 200개 만들었다.

3월 29일 오전 11시 송기면은 태극기를 가마니에 숨겨 시장에 이르렀고, 주모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마산면은 물론 장을 보러온 화양 한산 시초면의 주민도 동참했다. 송기면이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2000여 명의 주민들이 합세했다. 시위대의 위세에 위기를 느낀 일제 경찰은 송기면 유성렬 송여직 나상준 이근호 등 6명을 연행해갔다.

서천 마산면 신장리 만세운동 관련 송여직 나상준 고시상 이동홍 양재흥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에 대한 공주지법 판결문.
서천 마산면 신장리 만세운동 관련 송여직 나상준 고시상 이동홍 양재흥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에 대한 공주지법 판결문.
송여직 외 8명에 대한 1919년 5월1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판결문, 자료=국가기록원
송여직 외 8명에 대한 1919년 5월1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판결문, 자료=국가기록원

□ 경찰출장소 공격 감금됐던 6명 빼내

연행에 분노한 시위대는 나상준 고시상 이동홍 양재홍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 등의 선도 아래 경찰 출장소를 공격했다. 출장소에 돌을 던지고 장지문과 기물을 파괴한 뒤 감금됐던 6명의 연행자를 빼냈다.

송여직 등 8명의 재판기록에는 "이동홍 양재홍은 출장소의 유리와 장지문 등을 파괴하고, 박재엽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출장소에 침입 폭행하고, 고시상은 대들면서 (경찰의) 멱살을 잡았고, 정일창은 군중의 배후에서 선동 지휘하며 투석하는 등의 폭행을 했다"고 적혀있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주재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은 채 모두 파괴됐다. 유치장에 갇힌 주모자 6명을 빼내간 것도 큰 사건이었다. 일경의 발포로 부상자도 발생했다.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더 벌이기로 결정하고, 한산을 거쳐 서천읍으로 행진했다. 마산면과 한산면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서천군수 권익채가 급히 말을 타고와 일제 헌병이 매복해 있다며 해산을 요구했고, 시위대는 격렬한 항의 끝에 자진 해산했다. 주민들은 다음날에도 종천면 화산리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경은 신장리 장터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대거 체포하여 태형을 가하거나 재판에 넘겼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송기면은 징역 1년 6월, 유성렬 이근호 임학규는 1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출장소를 공격한 고시상 양재홍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은 각각 3년, 송여직은 1년 6월, 나상준 1년형을 치렀다. 수십 명이 태형을 받았다.

청양 정산면과 서천 마산면 신장리 만세운동이 역사에 남을 만큼 치열했지만 그 기록은 아주 소략하다.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순국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의 인적사항은 전하지 않고,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인정도 못받았다. 마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태를 맞은 수많은 애국지사의 숫자조차 알 수가 없다.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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