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⑤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길을 연 홍주의병
명성황후 시해·을사늑약 등 외세 침략에 일어선 유림들
조선말-대한제국 시기 최초 무장투쟁… 전국 봉기 촉발

1906년 병오년 홍주의병 당시 순국한 의병을 모신 홍성읍 홍주의사총. 김재근 선임기자

1949년 봄 홍성읍 홍주성 주변에서 나무를 심던 시민들은 땅에서 뼈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묻힌 지 꽤 오래된 사람의 유골이었다. 홍성군수와 홍성경찰서장 등 300여 명이 식목행사를 하던 터였다. 동네 노인들에게 수소문해보니 홍주의병의 유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홍주성과 홍성천 월계천 등에 대한 발굴을 진행, 수많은 유해를 수습했다. 유해 900구를 사당에 봉안하고 무덤을 조성, 구백의총이라고 했으며, 1992년에는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꿨다. 1906년 숨을 거둔 홍주의병의 넋을 43년만에 수습하여 안치한 것이다.

1895년 을미년 제1차 홍주의병을 이끈 김복한(왼쪽), 1906년 제2차 홍주의병을 이끈 민종식. 자료=국가보훈부
1895년 을미년 제1차 홍주의병을 이끈 김복한(왼쪽), 1906년 제2차 홍주의병을 이끈 민종식. 자료=국가보훈부

일제 강점기 유림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는 의문이다. 누가 뭐래도 조선조 500년은 유학과 주자학, 유림, 유생, 선비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홍주의병은 성리학의 의리론과 위정척사론를 신봉하는 유생들이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 외세의 침략과 서양문물 유입, 봉건체제 붕괴, 국권 상실 등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잘 보여준다

홍주(홍성)에서는 1895년과 1906년 2차례에 걸쳐 의병들의 항일 무장투쟁이 크게 일어났다. 홍주는 조선시대 홍주목, 홍주부가 설치됐던 곳으로 차령산맥 서북부의 행정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요즘 도청 소재지의 위상을 지닌 탓으로 일제하 충남 서북부에서 일어난 2차례 의병전투의 거점이 됐다.

1차 홍주의병은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린 게 발단이 됐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추진한 갑오개혁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해 4월부터 안창식 등이 군사와 무기를 수집하는 의병을 준비했다. 11월에는 유생들이 주도하여 민병 180여 명을 모으고, 유학자 김복한을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김복한은 대사성과 승지를 지낸 인물로 갑오경장에 반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있었다. 그가 참여하여 깃발을 들자 홍주를 비롯한 청양 공주 정산 대흥 등의 유생들이 속속 동참했다.

1895년 의병장 김복한이 의병을 모으기 위해 돌린 통문. 자료=국가보훈부

의병부대는 관찰사가 머무르는 홍주부에 진입, 관리들을 체포하고 내쫓았다. 관찰사 이승우를 압박하여 동참을 이끌어냈다. 김복한은 창의대장이라는 이름으로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보내 각 호마다 1명씩 병사를 징집하도록 했다. 관찰사 이승우도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으로 각 군(郡)에 명령하여 즉시 군사를 끌고오도록 했다. 의병과 관군이 뭉친 민관연합군이 탄생한 것이다. 병력이 늘어나자 조직을 정비하여 전투체제를 갖췄다. 선봉장은 정인희, 참모장 이세영, 남면 소모관은 채광묵 이창서 이봉학 이병승, 서면 소모관은 송병직을 임명했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는 진심으로 의병에 참여한 게 아니었다. 의병부대가 병력모집과 조직정비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 관병을 동원, 핵심 인물인 김복한과 이설을 잡아 가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홍주성의 의병부대로 합류하려던 서산, 남양, 대흥의 군사들은 돌아가버린다.

이처럼 1차 홍주의병은 이승우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의병을 주도한 23명이 체포됐고, 6명은 서울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김복한은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가 구형됐다. 그러나 조정의 신기선이 석방을 건의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모두 석방한다.

1,2차 홍주의병은 홍주부 관찰사가 있는 충남 홍성의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의 남문인 홍화문과 성벽. 김재근 선임기자

2차 홍주의병은 을사늑약이 계기가 됐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골자로 한 조약을 체결, 식민지배 체제를 갖췄다. 1차 홍주의병에 참가했던 안병찬 채광묵 등은 다시 거병을 도모하기로 하고, 정산에 있던 민종식을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민종식은 명성황후 집안으로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을미사변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정산에 내려와 살았다.

1906년 3월 민종식 이용규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등은 정산을 거점으로 하여 병사와 무기를 모았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1906년 5월 홍산 지치에서 기병하여 서천-판교-남포로 진군한다. 서천과 남포의 친일 군수를 잡아가두고, 일본군을 물리쳤다. 다량의 총포와 탄약을 확보했으며 군사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보령에서는 우국지사 유준근 의병부대가 가세했고, 결성을 지나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에 이르렀다.

의병들이 삼신당리에서 적을 격파하고 홍주성 안으로 총포를 퍼부었지만 관군이 4대문을 닫고 버텨 공격이 매우 어려웠다. 의병군은 꾀를 내어 병사 2명을 하수구로 침투시켜 성안에서 문을 열어졌혔다. 의병이 성을 장악하기 직전 적군은 북문으로 빠져나가 예산으로 달아났다.

홍주성을 장악한 의병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수성에 나섰다. 대장에 민종식, 참모장 김광우, 중군장 정재호, 좌익장 이상구, 좌군장 윤필구, 선봉장 이남규, 유병장 유준근, 참모사는 안병찬 등이 맡았다. 지도부는 유생이 많았지만 병사는 일반 백성과 보부상도 포함됐다.

홍주의사총 뒤쪽에 세워진 홍주의병 기념탑.
홍주의병 기념탑 앞에는 의병 당시 모습을 담은 조형물이 서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호서의 거점을 잃은 일본군은 곧바로 반격을 해왔다. 일본군이 5월20일부터 28일까지 6차례나 공격을 해왔지만 의병들은 치열하게 맞서 이겨냈다. 일제가 다시 수원의 진위대 57명을 보내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5월30일에는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 소좌의 보병 2개 중대와 전주수비대의 보병 1개 소대 병력을 보냈다. 기관총과 포까지 갖춘 일본군은 5월 31일 새벽 조양문에 폭약을 터뜨리며 공격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깊은 밤 성안에 침투했고 의병은 이들에 맞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만다. 민간인 1000여 명이 학살당했고, 성 안팎의 수많은 민가가 불탔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김상덕 등 60-70명이 전사했고, 83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남규진 유준근 이식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신보균 최상집 안항식 9명은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당했다. 채광묵과 채규대, 이남규와 이충구 부자도 2차 홍주의병 때 순국했다. 대장 민종식은 일경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나중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그후 종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홍주의병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말-대한제국 시기 최초로 무장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애국계몽이나 외교론과 성격이 전혀 다른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투는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를 촉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 이후 독립투쟁 및 3.1운동에 연결된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이끈 김좌진이 1차 홍주의병을 이끈 김복한의 제자이다.

의병이 도청급 관공서를 점령하고 10여일 간 장악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일제의 세력이 공고화된 훗날의 무장투쟁은 전면적인 전투 대신 유격전이나 기습, 폭발, 의열활동(저격 및 암살) 등의 전술로 옮아갔다.

유림이 주도적으로 참가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김복한이나 민종식 등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유학자나 유생 출신이다. 학계에서는 노론계 유학자 남당 한원진의 사상이 위정척사와 항일투쟁에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한다.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김복한 김덕진 유준근 등은 1919년 유림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독립탄원서)에도 서명했다.

홍주의병은 오랜 세월 호서의 수부도시였던 홍성의 존재감을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 일제의 침탈을 결코 용납하지도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홍주성 성벽을 붉은 선혈로 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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