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한옥을 짓고 살고자 하는 건축주가 늘고 있다는 소식은 전통건축을 전공한 필자에게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옥 건립을 상담하다 보면, 건축비 부담과 완공 후 유지관리, 잦은 수리비용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중심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한옥이 이제는 특별한 선택이 되어버린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그렇다면 한옥이 다시 보편적인 주거 대안으로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는 전통건축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과제이자, 지금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지금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 서 있다. 매년 여름은 더 뜨거워지고, 비는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변화는 이제 과학자들의 경고를 넘어, 우리 모두의 일상 속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지구에 큰 영향을 주는 한 분야가 있다. 바로 건축이다.놀랍게도 건물을 짓고, 사용하고, 허물기까지 전체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는 지구 온실가스의 약 40%나 차지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학교, 도시 곳곳의 건물들이 거대한 '탄소 거인'이 되어 지구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뉴욕 첼시(Chelsea)는 하이라인과 허드슨 야드로 대표되는, 누구나 아는 세계적인 문화의 심장부다. 본 기고는 그 화려함 뒤에 숨은 도시적 아이러니와 내면의 질문에 주목한다. 첼시는 맨해튼 서쪽, 14번가에서 30번가 사이, 허드슨 강변에 펼쳐져 있다. 특히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와 연접한 웨스트 첼시는 화려한 갤러리와 패션, 세계적 미술관과 유명 클럽이 가득한 무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늘 불평등에 기인한 누군가가 밀려나고, 또 다른 주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재편의 역사가 쌓여 있다.흥미롭게도 첼시의 허드슨 강변에는 거
요즘 건축 현장을 가보면 '탄소중립', '제로에너지'라는 단어를 쉽게 볼 수 있다. 건축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목표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막상 그 방법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외국산 자재와 수입 기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의 발전은 반가운 일이지만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지역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건축은 땅의 이야기이자 사람의 이야기다. 서산의 바람, 공주의 햇살, 부여의 흙빛은 그 지역의 건축에 자연스레 스며들어야 한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써서, 그 땅의
한국성은 우리나라가 가진 고유한 특성, 즉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만의 정체성을 뜻한다. 건축에서의 한국성은 오랫동안 많은 건축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다. 마당, 처마의 곡선, 황토벽, 온돌 등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적 특징이다.그런데 전통건축의 한국적 특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한국건축은 촉을 사용하지 않고, 못을 사용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기법으로 만든다.' 과연 우리 전통건축은 정말 촉과 못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번 글에서는 그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차가움이 가을을 뛰어 넘어 겨울을 성큼 당긴다. 이제 보일러 스위치에 손이 가는 계절이다. 이 계절의 변화 속에 건축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온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건축은 단순히 비바람을 막아주는 거대한 상자를 넘어서 계절의 엄포 속에서도 우리를 평온하게 지켜주는 온기의 방주다.인류의 삶 속에서 건축의 난방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지지는 난방'과 서양의 '데우는 난방'이다. 우리 온돌이 아궁이의 전도열과 복사열로 몸을 '지져' 따뜻함의 근원을 채
지난 기고의 리틀 이탈리에 이어, 이번에는 발걸음을 뉴욕의 또 다른 얼굴 '소호(SoHo)'로 옮겨본다. South of Houston Street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처럼, 소호는 언제나 뉴욕의 남쪽에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온 공간이다. 주철로 만들어진 캐스트 아이언(Cast Iron)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는 명품 부티크와 세련된 레스토랑, 갤러리가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화려한 쇼핑·문화 지구로 뉴욕의 아이코닉한 스타일로 상징되는 이곳은, 사실 19세기의 산업, 20세기의 예술, 그리고 21세기의 소비문화가 켜켜이 겹쳐진 도시
전 세계 건축의 역사는 시대마다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그 전환은 단일 요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 정치·경제적 상황, 사회 변화와 문화적 요구가 배경을 이뤘고, 건축 내부적으로는 천재 건축가의 등장, 구조역학의 발전, 혁신적 재료의 발견, 미적 감각과 장식의 변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건축의 역사는 여러 요인이 교차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낸 과정이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단연 재료다. 새로운 재료는 구조와 형태의 변화를 이끌며 건축 패러다임을 바꾸는 원동력이 됐다. 메소포타미아는 벽돌로 아치와 볼트를
시간은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시계의 초침처럼 공평하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Cronos)'다. 다른 하나는 영원처럼 기억되는 의미 있는 순간, 바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무심한 크로노스의 흐름 속에서 기적처럼 카이로스를 건져 올리는 것, 건축은 바로 그 놀라운 일을 해내는 매개체다. 건축은 단순히 벽돌과 시멘트의 집합이 아니라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이 스며든 살아있는 그릇이기 때문이다.누구나 어린 시절, 세상을 담을 듯 광활했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기억한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지난 기고에서 리틀 이탈리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이곳을 무대로 권력과 질서를 구축했던 마피아가 남긴 유산에 주목한다. 한때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라는 영화 '대부'의 명대사로 상징되던, 뉴욕의 변방은 이제 이민자의 생존 전략을 넘어 한 시대를 지배한 어두운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그 무대가 바로 '리틀 이탈리(Little Italy)'다.오늘날의 리틀 이탈리는 겉보기엔 낭만적인 관광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좁은 골목 안에는 복수의 윤리(Vendetta)와 침묵의 계율(Omerta)을 가진 조직범죄
설계공모 지역가점제의 목표는 분명하다. 지역건축사의 설계공모 참여를 늘리고, 그 참여가 지역 건축의 수준과 지역 경제의 활력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 같은 경기장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넓히는 제도여야 한다.우리 제도는 원칙적으로 지역 제한을 금지한다. 그 틀 안에서 가점은 '누구를 밀어주자'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리했던 지역팀의 진입 문턱을 낮춰 참여를 촉진하는 보정 장치다. 참여가 늘어야 실력이 쌓이고, 실력이 쌓여야 다음 공모에서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 이 학습의 순환이 지역건축 활성화의 시작점이다.제주에서 그 가능
한국 주택의 특징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겨울에도 따뜻한 바닥과 건물 내부에서 신발을 벗는 좌식 생활 문화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요소가 아니라, 한 가지 요소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바로 온돌이다.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온돌과 부엌에 대한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그만큼 이 두 요소가 우리 건축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온돌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최상위 계층이 거주한 궁궐에서도 온돌을 설치했다는 것이 확인된 만큼 온돌은 우리의 주거문화에 있어 중요한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교실을 가득 메우던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의자 먼저 앉기'라는 이름의 작은 의식이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약속된 궤도를 유영하듯 노래를 부르며 의자 주위를 맴돌았고, 음악이 멎는 순간 비어있는 단 하나의 자리를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그 의자를 차지한다는 것은 승리의 환희이자 안도감이었고, 밀려난다는 것은 패배의 씁쓸함이자 소외감이었다. 우리는 아마 그때 온전히 나를 받아주는 최소한의 영토, 즉 물리적 안식처의 소중함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른다.때로
맨해튼 남부, 멀베리 스트리트를 따라 바우어리와 소호, 차이나타운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다. 한때 수만 명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밀집해 '리틀 이탈리(Little Italy)'라 불리는 이곳은, 지금은 젤라토 가게와 기념품 상점이 늘어선 관광지로 변모했다. 그러나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틈새에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 삶을 일구던 이민자들의 기억과 생존의 서사가 여전히 스며 있다. 이는 단지 한 지역의 이야기를 넘어 뉴욕과 미국의 역사·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긴 유산으로, 오늘도 이 도시의 심장부를 울리고 있다.19세기 중
지역 사무소의 하루는 늘 선택의 연속이다. 당장 매출이 되는 입찰·수의·감리 일을 더 받느냐 아니면 몇 주를 태워 설계공모에 도전하느냐. 수도권의 많은 사무소가 공모에 맞춘 팀과 제작 체계를 상시로 돌리는 동안 지역 사무소는 다양한 수입원으로 현금을 지키는 구조다. 이 차이가 공모 참여의 기회비용을 키우고, 도전 자체를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출발선의 공정함을 보완하는 제도와 그 위에서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경쟁의 판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그동안 흔히 등장한 해법은 '지역 지분 30%'였다. 이름만 보면 균형 있어 보이지만
지난 칼럼에서는 전통건축이 대부분 단층으로 구성됐고, 중층 구조 역시 통 층 방식이 일반적이었음을 다뤘다. 이러한 형식은 기술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법제와 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기둥 높이의 제한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온돌의 보급은 2층 이상의 건축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전통건축을 둘러싼 오해는 단지 구조나 기술에만 그치지 않는다. 주거 공간의 구성 방식,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러한 오해는 여전하다. 이 주제는 앞선 칼럼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
누구라도 어릴 적 동네 목욕탕의 기억은 가지고 있다. 온탕에서 아버지의 "어 시원하다!"는 대단한 허풍에 나는 뜨거움을 참으려 목욕탕 벽의 타일 개수를 세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로, 세로, 더하고 곱하고… 아마도 나의 첫 수학 체험 학습은 목욕탕 타일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타일은 인류의 문명과 함께 빛나는 건축의 옷이다. 타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오래된 타일은 약 5000년 전,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인 사카라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푸른색 타일이다. 파라오의 영혼이 잠든 거대한 피라미드 내부를
지난 기고에서 차이나타운을 조명한 데 이어 이번에는 뉴욕의 또 다른 문화적 중심지, 바우어리(The Bowery)를 살펴본다. 17세기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의 개방성과 상업적 실험은 오늘날 뉴욕이 가진 도시성을 형성했고, 그 유산은 바우어리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한때 브로드웨이에 견줄 만큼 화려한 엔터테인먼트의 거리였던 바우어리는 이후 빈곤과 범죄의 상징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예술과 창조의 거점으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는 고급 호텔, 갤러리, 미슐랭 레스토랑, 부티크가 어우러진 힙한 문화지로 재편됐다.바우어리는 지역의 명칭
나는 서울의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13년을 일했고, 이후 천안으로 내려와 지역 건축사사무소에서 6년 간 근무했다. 그리고 이제 내 이름을 내건 사무소를 연 지 2년째 되어간다. 지역과 함께 호흡하며 설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현실의 벽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그중 가장 높고 두꺼운 벽은 바로 '공공건축 설계공모'였다.공공건축은 지역의 얼굴이자 공동체의 거점이다. 그 공간을 설계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 수차례 공모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반복된 실패였다.설계공모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형 사무소나 수도권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현대건축 설계 전공 교수님께서 전통건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전통건축은 나무로 만든 집인데, 기술이 없어서인지 2층 이상은 짓지 못했군." 또 다른 교수님은 "지붕 끝에 긴 나무를 덧대어 처짐을 막는 걸 보면 구조적으로도 문제가 많아 보여"라고 하셨다. 두 분 모두 국내외에서 저명한 학자이자 실무자였다. 당시 박사과정생으로서 설계 강의를 하며 학부생들과 답사를 하던 나에겐 이 발언들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현장에서 전통건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지만, 학계 내에 뿌리 깊은 선입견은 쉽게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