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맨해튼 남부, 멀베리 스트리트를 따라 바우어리와 소호, 차이나타운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다. 한때 수만 명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밀집해 '리틀 이탈리(Little Italy)'라 불리는 이곳은, 지금은 젤라토 가게와 기념품 상점이 늘어선 관광지로 변모했다. 그러나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틈새에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 삶을 일구던 이민자들의 기억과 생존의 서사가 여전히 스며 있다. 이는 단지 한 지역의 이야기를 넘어 뉴욕과 미국의 역사·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긴 유산으로, 오늘도 이 도시의 심장부를 울리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뉴욕은 전 세계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관문이었다. 초기에는 아일랜드와 독일 등 서유럽 출신이 주를 이뤘고, 이후 이탈리아·러시아·폴란드 등 동·남부 유럽 출신이 뒤를 이었다. 특히 이탈리아계 이민자는 통일 이후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몰락을 겪은 남부, 즉 시칠리아·칼라브리아·나폴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맨해튼 남부의 저렴한 주거지에 정착해 리틀 이탈리를 형성했으며,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구두 수선, 석공, 재봉, 식료품점과 식당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가족 중심의 노동자 계층 공동체를 이뤘다.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리틀 이탈리를 넘어 뉴욕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뉴욕의 다층적 정체성 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북동쪽 이스트할렘에 형성된 이탈리안 할렘은 한때 미국 최대의 이탈리아계 지역사회로 번성했다. 오늘날 이곳은 중남미계가 주를 이루는 스패니시 할렘으로 변모해 과거의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뤽 베송 감독의 명작 영화 '레옹'에서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극 중 이탈리아계 청부살인업자인 레옹이 의뢰를 받는 마피아, 올드 토니의 식당은 리틀 이탈리에, 부패한 마약단속국 요원에게 가족을 학살당하는 소녀, 마틸다와 레옹이 살아가는 아파트는 이탈리안 할렘에 위치한다. 또한, 그 아파트 입구 옆 창문에 걸린 푸에르토리코 국기는 라틴계로 이어진 변화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계는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 브롱스 등 외곽 지역으로 이주했지만 그들만의 정체성은 여전히 세대를 이어갔다. 1960년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실화를 그린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은 브롱스 출신 이탈리아계 건달 토니 립이 그의 운전사로 고용되며 벌어지는 여정을 그린다. 극중 토니의 일상을 통해 가족 중심의 정겨운 삶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운전 중 언쟁에서 토니가 셜리에게 내뱉는 "미치겠네, 내가 당신보다 더 흑인에 가깝다고!"라는 대사는 주류 사회로부터 할프 니거(Half Nigger)라는 멸칭으로 불려야 했던 오랜 차별로 인한 소외감을 대변한다.

이러한 이탈리아계 공동체가 남긴 가장 뚜렷한 유산은 단연 음식 문화다. 1905년 리틀 이탈리에 문을 연 미국 최초의 피자가게 롬바르디스(Lombardi's)를 시작으로, 뉴욕 스타일 피자와 미트볼 스파게티, 층층이 쌓인 라자냐는 토마토 소스를 활용한 '레드 소스 조인트(Red-Sauce Joints)'의 대표 메뉴로서 값싸고 푸짐한 그들의 가정식 요리를 뉴요커에게 전했다. 한편 영화 '그린 북' 속 토니 가족의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등장하는 바삭한 칼라마리 튀김, 마늘·허브 빵가루를 얹은 베이크드 클램, 스파게티 알레 봉골레, 허브와 레몬으로 버무린 해산물 샐러드인 마레 인사라타, 치즈와 리소토를 채운 아란치니는 '피스트 오브 더 세븐 피시(Festa dei Sette Pesci)'의 대표 메뉴다. 그러나 최근 리틀 이탈리의 풍경은 급격히 변하고 있으며, 130년 전통의 치즈 전문점 알레바 데어리(Alleva Dairy)를 비롯한 토박이 식당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압력 속에 문을 닫고 있다.

지금의 리틀 이탈리는 상업적 관광지로 본래의 경계는 흐려졌지만, 매년 열리는 산 젠나로 축제, 공동체의 중심인 성 패트릭 구 대성당, 최근 개관한 이탈리안 아메리칸 박물관은 이곳이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의 공간임을 증명한다. 이곳은 여전히 뉴욕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중심으로서 우리에게 "이 도시의 정체성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조용히 묻고 있다. 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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