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보존과학연구실 학예연구관
한송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보존과학연구실 학예연구관

2016년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발간한 '안산 대부도 2호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에는 갯벌에 묻혀있던 고려시대 배에서 발견된 곶감에 대한 설명이 있다. 발견 당시 사진을 보면 과육과 씨가 일정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요즘의 곶감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상태였다. 800년이 넘는 시간을 갯벌 속에서 보낸 곶감에서 풍기는 달큰한 냄새를 발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맡을 수 있었을까? 안산 대부도 2호선에서 발견된 곶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과거 사람들도 곶감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매우 귀한 자료이다. 하지만 대부분 발굴조사 현장에서 이렇게 온전한 형태의 음식물이 발견되는 일은 드물다. 대개 불에 타거나 단단한 겉껍질만 남아 있는 씨앗, 앙상하게 남은 동물 뼈, 토기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이물질의 형태로 남아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남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음식을 할 때 냄비 속 내용물이 넘치거나 타면 설거지는 여간 성가신 일이 된다. 이때 아무리 노력해도 제거되지 않는 달라붙은 음식물과 조리 흔적은 꽤 골칫거리다. 그러나 이 상황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의 토기 조각에서 발견된다면 나는 '유레카'를 외칠 것이다. 이 토기 조각에 남아있는 이물질을 분석해서 당시 사람들의 식탁 정보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산 대부도 2호선의 곶감처럼 실물을 보지 않아도 토기 속 유기잔존물을 분석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유기잔존물(organic residues)은 고고학 자료에 남은 동식물,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 등의 유기물 흔적을 말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지만 토기 표면이나 내부에 미세하게 흡수된 상태가 많고, 과거에는 형태가 변형된 채 굳어있는 이런 흔적들이 단순히 흙이나 이물질로 인식되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고고학 자료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유기잔존물 분석은 과거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 그것을 위한 생활 방식, 살았던 환경까지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유용한 연구 방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기잔존물 연구를 위해 질량분석법과 분광분석법을 적용한 GC/MS, IRMS, FT-IR, 라만분광분석 등의 분석 장비를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물고기, 도토리, 콩 등을 식량으로 이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로 오면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쌀, 기장 등 곡물의 잔존물이 확인되고 이것을 토기로 조리하거나 갈판에 갈아서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유기잔존물 중에서 뼈나 가죽처럼 일부만 존재하는 동물 유체에서 단백질을 추출해 분석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되어 연구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유기잔존물 분석은 참깨씨보다 작은 크기의 시료를 분석하여 옛사람들이 먹었던 음식, 사용한 재료 등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유기잔존물의 성분 분석뿐만 아니라 같이 발견된 미생물이나 기생충, 식물유체 등을 함께 분석하면 건강 상태 파악과 질병의 경로 추적이 가능하고, 유적의 성격도 밝힐 수 있다. 또한 유기잔존물은 특정 원소의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기후 변화, 농경 기술의 발달과 작물의 전파, 동물의 가축화, 인간이 섭취한 식량의 변화와 생존 방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유기잔존물 연구는 과거 인간 활동을 알아가기 위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분야이다. 다만 연구 대상이 갖고 있는 재료적인 제약, 오염, 변질 등으로 원래의 상태를 밝히는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 대상을 선정하는 단계부터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정밀한 분석을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적용, 고고학을 비롯한 화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융합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송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보존과학연구실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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