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은 생명체에 해롭다.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물론 방사선은 실생활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촬영과 암 치료에, 공항의 보안검색대나 조선소의 용접 검사에도 방사선이 쓰인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 연구에 빠질 수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는 적은 양의 방사선이라도 몸에 나쁠 수 있으니 가능한 피하라는 식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상식을 곧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서드베리 근교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연구시설, 스노랩(SNOLAB)이 있다. 폐광에 건설한 이 시설은 그 깊이가 무려 2000m나 된다. 도대체 왜 과학자는 이렇게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연구하는 것일까. 땅속 깊은 곳에 들어가면 우주에서 쏟아지는 방사선을 최대한 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방사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태양과 머나먼 별로부터 방사선이 끊임없이 날아든다. 다행히 지구에는 강력한 자기장과 두꺼운 대기층이 있어 우주 방사선을 완벽하지는 못해도 많이 막아준다. 덕분에 지구 표면에서는 방사선이 화성 표면의 10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방사선은 가끔 황당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2003년 벨기에의 한 지방 선거 결과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컴퓨터가 후보자 중 한 사람에게 4096표를 더 준 것이다. 컴퓨터는 0과 1, 두 숫자만 사용하는 2진법으로 숫자를 센다. 4096표 차이는 컴퓨터 내부 메모리에 저장된 숫자 한 자리가 0에서 1로 바뀐 데서 비롯됐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방사선이었다. 사후 검증이 가능한 선거였기에 망정이지, 자율주행 중인 자동차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요새는 양성자가속기나 연구용원자로에서 반도체를 방사선에 쪼여 엄격한 시험을 거친 뒤 생산하기 때문이다.
지하 연구시설에서는 두꺼운 지각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방사선을 막아주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사선의 장난이 최대한 억제된다. 그래서 이런 곳은 '유령 입자'라고 불리는 중성미자를 연구하기 좋다. 대부분의 방사선은 지각에 막히지만, 중성미자는 수천 미터의 지각도 손쉽게 투과한다. 그 덕에 2015년 노벨 물리학상은 일본의 지하 시설 슈퍼 카미오칸데와 스노랩의 폐광에서 중성미자를 관찰한 가지타 다카아키와 아서 B. 맥도널드에게 돌아갔다. 은하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암흑물질도 지하 연구시설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방사선의 영향이 훨씬 덜 한 지하 깊은 곳에서라면 암흑물질을 관측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노랩에서는 효모균을 사용해서 방사선이 거의 없는 환경이 생명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놀랍게도 방사선이 없을 때 오히려 생존율이 떨어졌다. 캐나다에서 열린 행사에서 만난 스노랩의 책임자 조디 쿨리 박사는 우리 상식에 반하는 이 결과가 노벨상급 발견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구의 생명체는 수십억 년 동안 방사선이 있는 환경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사선이 있어야 생명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실 이 실험 외에도 매우 적은 양의 방사선은 생명체에 꼭 나쁜 것은 아니란 연구 결과가 있었으니, 노벨상 운운은 과장이리라.
그런데 방사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방사선이 가장 약한 곳에서 발견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과학은 예측불허하므로 다양한 시도가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우리나라도 몇 해 전부터 강원도 정선군에 예미랩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한국 중성미자 관측소라는 새로운 지하 실험시설도 구상 중이다. 또 다른 상식을 뒤집는 결과가 이들 시설로부터 나오길 기대해 본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