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30년 숙원이던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를 공식화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연구자들이 과제 수주 압박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환경에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기반이 열렸기 때문이다. 다만, 후속 방안으로 제시된 '전략연구사업'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자칫 이 방안이 PBS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름만 바꾼 PBS'에 머무르는 것은 아닌지, 국가 R&D 생태계의 선순환적 개혁을 위한 근본 해법이 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PBS 제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연구자의 인건비'를 '연구 과제' 수주 실적에 연동시킨 점이다. 지난 30년간 연구자들은 인건비 확보를 위해 '과제 영업자'로 내몰렸고, 자연히 장기적·도전적 연구보다는 '단기 성공' 중심의 과제를 추구하게 되면서 '코리아 패러독스(높은 투자, 낮은 성과)'는 심화되었다. 진정한 PBS 폐지의 핵심은 바로 이 '인건비의 과제 종속'이라는 고리를 끊어내는데 있다. 그런데 '전략연구사업'은 기존 PBS 예산을 기관별 전략기술 연구과제로 대체하는 구상이다. 이는 여전히 '연구과제'를 기반으로 인건비를 확보해야 하는 기존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현장에서 "PBS 정의에 가장 충실한 모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자칫 30년간 고착된 관료 중심의 R&D 통제 방식이 이름만 바뀐 채 유지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국가 R&D의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사업' 지원 방식의 변화를 넘어 '제도'와 '시스템'의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인건비 100% 출연금화'를 조속히 법제화해야 한다. 연구과제 수주와 무관하게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개혁의 제1원칙이다. '2027년까지 100% 달성'처럼 명확한 시한을 못 박고 법제화하여, 정책이 흔들리지 않을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출연연 중심의 연구 자율성'을 확립해야 한다. 정부는 '12대 국가전략기술'이나 '국가 이니셔티브 전략'과 같은 거대 아젠다와 국가적 임무(Mission)를 제시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그 임무를 달성할 구체적인 연구 기획과 수행은 전적으로 출연연에 맡기는 법률에 근거한 대원칙이 필요하다. 셋째, '질적 평가 중심의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PBS가 폐지되면 성과 평가는 더욱 중요해진다. 현재의 행정적·관료적 지표 중심의 평가는 지양하고, 세계적 석학들의 심층 동료 평가(Peer Review)를 통해 연구의 질과 파급력을 평가하는 선진국형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기술이전 수입(기술료)처럼 경제적 가치로 환산 가능한 객관적 지표가 중요한 성과의 바로 미터가 되어야 한다.
출연연의 PBS 폐지는 국가 R&D 생태계 전체를 혁신하는 '출발점'일 뿐,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다. 당장 출연연 PBS 예산의 30% 수준을 차지하는 타 부처(산업부, 국토부 등) 지원 사업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이와 관련하여 부처별 칸막이의 상징인 '예산 실링(총액한도)제'는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등의 문제들은 국가 R&D의 종합조정 기능 강화와 직결되며, 이는 얼마전 이재명 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가 제시한 '연구개발 생태계 혁신방안'의 큰 그림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 30년간 관료 주도의 PBS 국가 R&D 시스템은 전체 규모의 양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연구 현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질식시켰다. 이제 그 역할을 본래 주인인 연구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단기적인 처방과 임시방편의 연구사업 추가만으로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진정한 국가 R&D의 중심축으로 바로 서기 위한 첫걸음은 '인건비의 완전한 출연금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