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소프트웨어를 넘어 로봇, 자동차와 결합하는 '피지컬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기술 패권 경쟁에 돌입했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생태계, 엔비디아의 AI 플랫폼, 중국 DJI의 도심 항공 시스템처럼 AI는 이제 국가 경쟁력과 우리 삶을 좌우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세계 최초', '기술 강국'을 외쳤지만, 정작 이렇다 할 연구 성과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R&D 투자에도, 10년 전만 해도 우리 아래로 여겼던 중국에 마저 기술 주도권을 내주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K-R&D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R&D 목표의 불명확성'이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와 단기 성과 위주의 평가 시스템은 R&D가 최종 결과물 대신 성공하기 쉬운 개별 '요소기술' 개발에만 매달리게 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술이 논문과 특허 형태로 쌓였지만, 이를 통합해 시장에 내놓을 완성도 높은 자율주행차나 로봇은 탄생하지 못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이는 우리가 수많은 기술을 보유하고도 정작 최종 제품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비효율적인 시스템도 문제의 핵심이다. 부처마다 제각기 R&D 사업을 벌이는 '칸막이 행정'은 고질적인 중복 투자와 비효율을 낳고 있다. AI 반도체는 과기부와 산업부가, UAM은 국토부가 맡는 식의 분절된 정책은 국가적 시너지를 막는다. 수년 전부터 추진된 사회문제 해결형 R&D 사업조차 국민이 체감할 소방·구조 로봇 같은 구체적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여기에 기술 전문성이 부족한 관료가 R&D를 기획하고 평가하다 보니, 혁신적인 도전보다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과제'만 양산된다. 98%라는 비현실적인 R&D 성공률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증명하는 씁쓸한 지표다.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해법은 명확하다. R&D 시스템의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첫째, 지금의 혁신본부 기능을 강화하여 부처 위에 존재하는 강력한 'R&D 컨트롤 타워'를 세워야 한다. 미국의 과학기술정책실(OSTP)처럼 국가적 우선순위를 정해 R&D 역량을 전략적으로 집중시키고, 부처별 예산 실링제를 폐지하여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어 중복 투자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
둘째, R&D 기획과 연구 수행의 중심을 관료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등 전문가 집단으로 과감히 옮겨야 한다. 전문가(선수)들이 국가에 필요한 연구를 마음껏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심판)는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책 결정과 성과 확산에 집중하는 건강한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출연연의 법률적 지위와 위상을 강화시켜야 한다.
셋째, 대형 국가 전략연구사업의 목표를 '결과물' 중심으로 전면 재설정해야 한다. 단순히 논문·특허 개수가 아니라, '실제 작동하는 시스템'을 목표로 제시해야 한다. 가령 '시속 100㎞ 주행이 가능한 레벨 4 자율주행차 개발'이나 '72시간 무인 생산 스마트 공장 구축'처럼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모든 요소기술이 이 시스템 통합에 기여하도록 체계를 바꿔야 한다. 기초연구는 논문과 특허로, 개발연구는 사업화와 기술료 등으로 사업별 연구 성과를 차별화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나노, 소부장, 5G 등 수많은 구호를 외쳐왔다. 이제는 구호가 아닌 결과로 증명해야 할 때다. 이번에도 변화의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차세대 AI 산업 혁명의 주역이 아닌 추격자로 남게 될 것이다. 이재명 새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 R&D 시스템의 전면 적인 개혁을 기대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