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현 한국과학기술원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
성지현 한국과학기술원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

한국은 2012년 세계 최초로 'SMART' 소형모듈원자로(SMR)의 표준설계인가를 받았고, 윤석열 정부는 원전 10기 수출과 독자 노형(i-SMR) 개발을 국가 에너지정책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대형 원전 분야에서도 한국은 중동 바라카 원전과 체코 신규 원전 수주에 성공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왔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정부가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는 원자력, 특히 차세대 SMR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빠졌다. 불과 지난해 정부가 '12대 국가전략기술'에 차세대 원자력을 포함시켰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누락은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원자력은 단순한 전력원 이상이다. 긴 생애주기와 산업 생태계를 고려할 때, 정권 교체 때마다 정책 기조가 뒤집히는 구조는 산업 기반을 붕괴시키고 전문 인력을 이탈시킨다. 이번 누락은 SMR과 같은 미래 산업을 바라보는 청년 인재와 기업에게 '국가가 원자력을 전략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상징적 신호가 되어, 진로 선택과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이번 하반기에 학부 과정에서 원자력 관련 전공과목의 수강 신청 인원이 크게 줄어든 것은, 학생과 학부모가 정부 정책 기조의 불확실성을 체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곧 인재 기반 약화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전반의 국제 경쟁력을 무너뜨릴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다시 원자력 에너지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미국은 대형 원전 신규 건설은 물론, SMR 개발에 행정명령과 연방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유럽도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원전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글로벌 IT기업들은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를 위해 SMR에 투자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전 세계 전력 수요가 현재의 2.5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며,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량을 최소 2배 이상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데이터센터·수소생산 등 차세대 산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무탄소인 전원을 필요로 한다. 기존 전력망과 분리해 현장(on-site)에서 자체적으로 전력을 생산·공급할 수 있는 SMR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최적의 해법이자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다. 그런데도 한국이 국정계획에서 원전을 공백으로 남겨둔 것은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로 가는 선택이다. SMART 원전이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받았음에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개발과 실증이 지연되는 사이 미국 NuScale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한 전례를 떠올려야 한다.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SMR 붐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또다시 5년 이상의 공백을 자초한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국정운영 계획은 단기적 정책 문서가 아니라, 미래 세대와 산업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 청사진이다. 과거 탈원전 정책의 부정적 경험이 여전히 업계와 청년들에게 깊게 남아있는 지금, 또다시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정권 교체 때마다 원자력 정책이 뒤집히는 악순환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원자력에너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며, 과학과 사실에 기반해 에너지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은 앞선 기고에서 거듭 강조한 바 있다. 이번 국정계획에서 원자력을 전략기술에서 배제한 것은 에너지 안보와 기후 대응이라는 시대적 과제에도 역행하는 행보다. 또한, 산업계와 국제사회에 정책 의지의 약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정책 불확실성은 산업계와 연구계의 사기를 꺾고, 청년 세대의 진로 결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 번 꺾인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는 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정부가 이번 전략을 재검토하고, 국가 12대 전략기술로 이미 선정되었던 차세대원자력·SMR을 섣불리 번복하지 않기를 촉구한다. 일관된 정책 기조와 올바른 전략적 안목이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원자력 기술이 국제 경쟁력을 이어가며, 기후위기에 책임 있게 대응하고 미래 산업의 토대를 다져가는 길이다. 성지현 한국과학기술원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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