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히 갤러리메르헨 관장
양세히 갤러리메르헨 관장

얼마 전, 대전 화랑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 깊은 자리가 있었다. 이갑재 이응노미술관 관장의 '초청 간담회'는 오랜 시간 제각각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해 온 대전의 갤러리스트들에게 큰 위로와 동지애를 안겨준 만남이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미술 생태계를 지켜온 이들에게 이번 간담회는 화랑계의 변화와 공동의 과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이응노미술관의 주요 현황과 운영 사업, 고암 이응노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전시 및 학술 연구 기능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작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의 체계는 물론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기 위한 변화들도 소개됐다. 특히 전시실은 자연광을 활용한 새로운 인테리어로 단장됐고, 통유리 창 밖에서 흔들리는 풀잎조차도 고암의 고독과 예술적 울림을 더욱 깊게 전해주는 풍경이 됐다.

지난 2007년 개관한 이응노미술관은 '지역성과 세계성의 조화'를 목표로 쉼 없이 진화해왔다. 2023년 11월 열린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전시와, 이듬해 세계적 블루칩 작가로 떠오른 김윤신의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전시는 일반 시민에게도 큰 감동을 선사하며, 기획 전시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킨 사례로 평가받았다.

이어진 2025년 기획전 '빛나는 여백: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들'(1월 17일-4월 6일)은 11인의 여성 예술가들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를 조망한 의미 있는 전시였다. 고암의 제자, 동료, 혹은 삶의 여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이응노의 예술 세계를 다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전통을 계승하거나 서양화법을 받아들이며 치열하게 변화에 대응한 이들의 고독한 여백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예술적 내면을 조명하는 귀한 기회가 됐다.

이응노미술관은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젊은 창작자들을 위한 '대전 아트랩'과 중견 작가전, 매년 3월 공모를 통해 선발되는 '파리 이응노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은 지역 예술가들이 해외 프로그램과 작업 공간을 통해 창작의 동력을 되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장년층과 청년 작가 모두에게 품격 있는 전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무엇보다 이응노미술관은 시민의 삶과 예술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열린 미술관'이 되고 있다. 이는 곧 가장 가까운 이웃인 대전 시민을 위한 길이며, 나아가 누구나 고암의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고통과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혁신으로 세계로 나아간 이응노의 삶과 예술은 오늘의 미술관과 대전 미술계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 이응노미술관은 새로운 세대, 미래 세대와 예술의 가교가 되어야 하며, 관람객에게는 쉴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로는 내달 24일까지 진행 중인 '신중덕: 추상, 생명' 전이 있다. 물질과 공간,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 사유를 담은 이 전시는 '생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작가의 오랜 추상 회화 여정을 시대별로 섹션화하여 구성했다.

또 하나의 여름 추억을 선사할 야외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한여름 밤, 가족과 함께 미술관 잔디밭에서 즐길 수 있는 '이응노 미디어 파사드'다. 웅장한 영상이 미술관 외벽에 투사되며, 일몰 후부터 밤 10시까지 상영된다(8월 1일- 8월 16일). 영상과 자연, 예술이 어우러지는 이 시간은 관람객에게 또 하나의 특별한 감동으로 남을 것으로 기대된다. 양세히 갤러리메르헨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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