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회 호서대학교 기술경영 대학원 교수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428년 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 목숨을 건 외침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절망적 상황에서 결연하게 왕에게 올린 보고서의 한 단락이며, 무고한 혐의를 받고 모진 고문과 옥살이에서 풀린지 겨우 넉 달이 될 즈음이었다. 죽이라고 지시한 그 왕에게 다시 생명줄을 맡긴 것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심정으로 자진하여 목숨을 내놓았단 말인가. 1592년 4월 오랜 내전을 통하여 훈련된 정예 왜군 15 만여 명이 3개의 방면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한양이 점령되고 왕 선조는 백성의 돌팔매를 맞으며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왕이 떠난 궁궐은 성난 백성들에 의하여 불태워지고 나라의 질서는 뿌리째 흔들렸다. 당시 조선은 200여 년간 지속된 평화 늪에 빠져 당쟁과 무사안일에 젖어있었다. 더욱이 정파 이익만 추구하던 지도층은 전쟁 대비하면 백성이 불안해하고 민심이 흉흉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막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7년간이란 전쟁 참화에 시달리며 백성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아비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신을 서로 먹으려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다행히 뜻 있는 의병장이 전국 각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옥포 해전에서 처음으로 승전한다.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왜군의 전면적 공격으로 한산대첩이 벌어졌으나 이순신 조선 수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후 장군은 미륵도에 수군본진을 설치하였고 전쟁은 5년간이나 남해안을 주변으로 지루한 대치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와중에 일본의 간첩 농간에 빠진 조선은 이순신을 반역죄인으로 엮어 한양으로 압송한다. 이순신 없는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무기도 군사도 모두 잃고 만다. 즉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자원을 탕진하고 왜군에게 부활의 기회를 준 것이다. 급기야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세상에 임명장 하나 주고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은 네가 알아서 전쟁하라는 것이다. 이게 당시 조선의 실상이었고 왕의 처사였지만 이순신은 오로지 백성과 나라 구할 방도만 고심할 뿐이었다. 싸울 전선도 무기도 군사도 없이 싸워야 하는 동서고금 역사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군은 남의 종 집에서 묶기도 하고, 길가에서 백성을 만나면 같이 손잡고 목숨을 잘 부지하라고 다독이며 어려움을 같이했다. 끝내 백성은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며 장군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전시에 누구나 전쟁터에서 멀리 도망가는 당연한 이치가 틀어진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배 12척에 군사 200여 명으로는 2 만여 명의 왜군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붙이라는 미욱한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 맞서 장군은 단 하나 백성과 나라의 보존만을 생각하며 '아직 12척이 있으니 싸워나 보겠다'고 피맺힌 절규를 한 것이다. 이게 승리나 생존 희망보다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이순신은 잘 알고 있었다. 천행으로 12척 전선과 부실한 무기와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울돌목을 막아 7년 전쟁의 승기를 잡게 된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서 '아직'이란 긍정과 희망적 인식으로 대처하는 장군으로부터 필자는 큰 힘을 얻는다. 오늘날 경영이든 삶이든 IMF 때 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고들 한다. 거리에 빈 상가가 널려있고 100만 명이 넘는 실직자가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하여 국민이라는 허울 속에 너를 죽여서 내가 살겠다는 살벌함이 더해지는 정치판에 날씨마저 기록적인 물폭탄과 찜통더위이다. 환경도 삶도 그 어느 때 보다 힘들고 어렵고 팍팍하다. 허나 군사도 무기도 없이 싸워 이긴 장수가 있었다. 불가능의 상황을 긍정과 수용이란 마음 달램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 이름 이순신을 부르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고비를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다. 김동회 호서대학교 기술경영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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