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얼마 전 한 카이스트 교수의 고백은 과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단 오분간의 전화 통화로 수천억 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 사업의 평가를 진행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만으로는 아직 그 진상을 예단하기 이르다. 정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있었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실무자만 혼내는 식의 꼬리 자르기로 끝내서도 곤란하다. 그리고 어렵게 목소리를 낸 분께는 불이익이 없기를 바란다.

필자는 일상적으로 연구 사업 평가에 참여한다. 요새는 컴퓨터 화면을 통해 문서를 읽지만, 예전엔 읽어야 할 문서가 책상 위에 탑처럼 쌓이기 일쑤였다. 덤덤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이 문서 하나하나에 얼마나 큰 꿈과 수고가 담겨 있는지 새삼 느끼고 전율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연구자가 흘린 땀방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아무리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마지막 구두점 하나까지 다 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과학기술 혁신 체계에 있어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 사업이 끝난 후 얼마나 좋은 성과를 거뒀는지 판단할 때는 물론이고,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하고,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여, 필요하다면 사업을 중단하거나 변경하는 등의 모든 과정에 평가가 곁들여진다. 그 결과에 따라서 연구비가 삭감되기도 하고 연구자의 거취가 흔들리기도 한다. 많은 과학자가 신경을 곤두세워 평가 준비에 매달리고, 때때로 평가 방식이나 평가위원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 분야의 평가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현대적 의미의 과학이 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평가 제도가 없었다. 16세기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천문대를 설립했는데, 초신성을 관측했던 명성과 자신이 귀족이라는 배경을 활용한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권력자의 환심을 사서 취업하거나 예산을 받아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관행이 바뀐 것은 유럽 각국에 왕립학회가 설립된 이후이다. 왕립학회는 비전문가인 왕실 구성원을 대신했고, 학회지에 논문을 싣고 그 내용을 동료 전문가가 심사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 동료 심사의 전통은 쭉 이어져 과학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늘어난 20세기 들어 정교하게 발전했다. 국가가 투자하는 연구비에 대한 평가도 여러 단계에 걸쳐 익명의 심사위원이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관료화한 평가 방식의 부작용도 발생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늘어나고 평가 기간은 길어지며, 논문이나 특허와 같이 계량하기 좋은 결과와 단시일 내 보여줄 수 있는 성과가 선호되곤 한다. 여러 심사 단계를 거치며 혁신적인 제안이 배제되는 경향도 보인다.

이런 점에서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다르파)이 채택한 방법은 눈여겨 볼만하다. 다르파는 혁신 기술을 신속하게 개발하기 위해서 복잡한 평가 절차를 따르기보다 프로그램 매니저의 비전과 판단을 믿기로 했으며, 이 과정에 실패도 용인하기로 했다. 그 성과는 놀랍다. 인터넷, GPS, 드론, 스텔스 등 세상을 흔든 다수의 기술이 다르파를 통해 선보였다. 정교한 평가 방법보다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어쩌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이를 지켜본 여러 나라에서 다르파를 벤치마킹하려고 애쓰고 있다.

현재 세계는 치열한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 있다. 이 와중에 지난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줄인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다행히 새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늘린다지만, 과연 증액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나라는 연구시설 건설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일조차 헤매는 모습을 자꾸 보여줬기에 걱정이 앞선다. 지나치게 서두르면 앞서 언급한 것 같은 사건이 또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예산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서는 사업 목적에 적합한 평가 방식부터 도입하고, 전문가들이 양심에 따라 치열하게 검토하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