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비대위원장으로 정치 입문해
당권을 잡았지만 '떠밀려' 퇴장
'심모원려'하면 기회는 오는 법

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여파로 16일 사퇴한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지난해 12월 하순 여의도 정치 무대에 데뷔했다. 국민의힘은 두 달 앞서 치러진 서울 강서구청장 재보선에서 보기 좋게 참패했다. 그 책임을 지고 김기현 대표가 물러나자 그에게 비상대책위원장 자리가 주어졌다. 재보선 패배가 정치에 입문케 한 역설이다. 그만한 인물도 없었다. 법무 장관을 지내는 동안 인상적인 대야 전투력을 보여온 데다 팬덤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대통령과의 특수관계도 은연중 뒷배가 됐을 것이다.

한 대표는 그렇게 원내 2당이던 여당 간판 얼굴이 됐다. 엘리트 검사 이미지가 각인돼 있었지만 우려감은 당안팎의 기대치가 상쇄하고 남았다. 여당 지도부에 무혈입성한 흔치 않은 경우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목전에 둔 22대 총선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 당면 과제였다. '번 아웃'되는 분투에도 불구, 총선 성적이 따라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고 어쨌든 한 대표가 총괄 지휘한 전국 단위 선거에서 바닥을 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까스로 100석을 넘겼지만 총선에서 완패함으로써 타격이 컸다. 한 대표는 총선 다음 날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놓았다.

가정이지만, 한 대표에겐 비대위원장을 받지 않는 것도 선택지였을 것이다. 편하게 '리베로' 자격으로 후보 지원 유세에 전력투구했으면 상황이 달리 전개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설령 총선 성적이 안 좋아도 책임의 무게가 적어 리스크를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 각료에서 여당 비대위원장으로 직행할 때는 짜릿했겠지만 변화무쌍하고 불확실성의 연속인 정치 영역에서 추락은 자칫 한 순간이다. 결과론이지만 한 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아 치른 총선에서 패장이 됐다면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 대표에게 비대위원장 자리는 거저 굴러온 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 외곽에서 자유롭게 운신했더라면 유망주로서 기회는 언제든 오게 돼 있었다. 그게 아닌 길을 걸은 결과, 한 대표는 필요 이상의 내상을 입었다 할 것이다. 기회비용을 치르면 학습효과라는 게 남는 법이나 지난 4·10총선 패배의 경우 단순 병가지상사가 아닌 화근의 전조였다는 점에서 상황이 심각했다. 설상가상 대통령과의 사이도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말았다. 원인제공을 어느 쪽이 했든 대통령 권력과 불화하거나 충돌하게 되면 호흡이 가빠지는 것은 미래권력일 수밖에 없다. 한 대표로선 불운이고 정치적 딜레마였다.

총선 후 잠시 휴지기를 갖고 있던 한 대표는 지난 7·23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 당대표로 선출돼 보란 듯 컴백했다. 그날부터 기산해 146일간 여당 수뇌로서 당을 이끌다 다시 내려왔다. 한 대표 입장에선 바람잘 날 없는 나날이었다. 거야의 입법 독주 앞에 무기력한 여당을 아우르는 일이 여의치 않았으며 용산과의 관계마저 살얼음판 걷듯 악화일로의 연속이었다. 특히 여권의 상징적 투 톱 관계가 회복불능처럼 비쳐졌다. 급기야 12·3 비상계엄 폭탄이 한밤중에 터졌다. 파국의 뇌관이었다.

이 변고로 국민의힘 한동훈 체제는 다섯 달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됐다.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키기는 했지만 당 대표직도 날아간 것이다. 계파 불문하고 선출직 최고위원 5명도 탄핵안 가결 직후 열린 의총에서 사퇴해 버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고 어쩔 수가 없는 귀결이었다. 한 대표는 이렇게 또 한번 불명예 퇴장 기록을 남기게 됐다.

한 대표는 9회 말 구원투수 심정으로 비대위원장을 받고 정치에 발을 담근 후 1년 가까이 간단 없는 풍파를 맞아왔다. 그 과정이 정치적 자산일 수 있지만 확장성 등에서 다소 한계를 노정한 측면이 없지 않다. 대통령과의 연줄도 끊겼다. 하지만 일기일회는 남아있다. 심모원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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