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전투
최정예 북한군 6사단과 치열한 교전… 83명 전사
1955년 1월까지 대둔산지구 빨치산 토벌에도 앞장

논산시 계백로 930에 조성된 강경전투 순국경찰과 합동 묘. 강경전투에 참전했다 살아남은 한효동 순경이 1983년 강경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성역화사업을 해냈다. 김재근 선임기자

6.25 전쟁 초기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곧바로 부산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북한군은 부산을 향해 대전-김천-대구-부산에 이르는 중앙의 경부축에는 3사단, 4사단, 105전차사단을 배치했고, 서쪽의 충남-전북-전남-경상도 서부 전선에는 6사단, 중동부 진천-청주 전선은 2사단이 담당토록 했다.

강경 순국경찰관 합동묘 앞에 세워진 묘비. '순국경찰관 제공지묘'라고 써있다.
강경 순국경찰관 합동묘 앞에 세워진 묘비. '순국경찰관 제공지묘'라고 써있다.

소련제 T34 전차까지 동반한 북한군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일본에서 급파된 미군은 항공기까지 동원하며 저지선을 구축했고, 국군도 전쟁 초기 무너졌던 부대를 재편성하여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함동묘역 앞에 세워진 충혼탑. 앞면에 강경전투에서 전사한 경찰 83명의 이름이 새개져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함동묘역 앞에 세워진 충혼탑. 앞면에 강경전투에서 전사한 경찰 83명의 이름이 새개져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미군 24사단은 경부축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3, 4사단 및 105전차사단과 오산-천안-전의-조치원-금강에서 잇따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24사단 딘 소장은 스미스부대를 북상시켜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인 이래 20일 대전이 함락되기까지 끈질기게 지연전을 펼쳤다. 중부를 맡은 국군 수도사단과 1, 2사단도 북한군 2사단과 15사단을 맞아 진천과 청주, 음성에서 방어전을 전개했다. 북한군 2사단은 청주에서 수도사단의 저항에 막혀 대전행을 포기하고 황간으로 진로를 바꿔야 했다.


□ 충남 아군병력 취약, 공백 상태 빚어져

이 무렵 경부축 서쪽의 충남은 본격적인 전투 병력이 없이 경찰과 일부 군병력만 산재한 공백상태가 빚어졌다.

방호산 북한군 6사단장. 6.25때 전공으로 '이중 영웅'이 됐지만 연안파로 몰려 1959년 숙청됐다.
방호산 북한군 6사단장. 6.25때 전공으로 '이중 영웅'이 됐지만 연안파로 몰려 1959년 숙청됐다.

충남-호남 남침을 맡은 북한군은 방호산이 이끄는 최정예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중국의 인민해방군 166사단이 주축이 된 부대였다. 동북3성 조선의용군으로 구성된 166사단이 1949년 북한에 들어와 김일성 군대의 6사단으로 개편된 것이다. 6사단은 3개 연대에 T-34전차와 SU-76자주포 대대를 갖췄고, 제603모터사이클연대 등을 배속받아 실제는 2개 사단의 화력을 자랑했다.

북한군 6사단은 한강을 가장 먼저 건넜으며, 수원-천안을 거쳐 7월 14일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충남을 휩쓸기 시작했다. 충남경찰 2개 대대가 나섰지만 청양, 홍성, 보령, 서천 비인 등에서 패배하고 금강 남쪽으로 밀려났다.

강경전투 순직경찰관 합동위령제 소식을 전한 대전일보 1951년 7월 15일자 기사.
강경전투 순직경찰관 합동위령제 소식을 전한 대전일보 1951년 7월 15일자 기사.

6사단의 본격적인 첫전투가 강경전투이다. 6사단 1연대는 부여 세도에서 강을 건너 강경읍내 황산리, 15연대는 부여 양화를 건너 웅포, 13연대는 서천 장항을 건너 군산을 진입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당시 강경읍의 전황은 혼란스러웠다. 강경경찰은 정성봉 서장 이하 220명이 미군 24사단의 명령에 따라 미 24사단과 북한군 4사단의 전투지역 밖인 전주로 내려가 전주초등학교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북한군 4사단이 남행을 하지 않고 대전으로 우회해가면서 강경읍에 공백이 생겼다. 국군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16일 정오 전주에 머무르던 강경경찰에게 읍내 복귀 명령을, 오후 7시30분에는 금강 남안의 용안-웅포-강경 라인 사수 명령을 내렸다.

논산경찰서(옛 강경경찰서) 앞에 '경찰 6.25 격전지'라고 새긴, 강경전투 기념 표지석이 서 있다.
논산경찰서(옛 강경경찰서) 앞에 '경찰 6.25 격전지'라고 새긴, 강경전투 기념 표지석이 서 있다.

 


□ 전주에서 긴급 복귀, 야간에 경찰서 탈환

정성봉 서장은 곧바로 3개 중대를 편성, 오후에 간단한 전투훈련을 실시한 뒤 밤에 강경으로 이동, 시내에 진입했다. 강경경찰은 좌익무장대 10명을 체포하고 경찰서를 탈환했다. 토착 좌익세력이 북한군의 남침에 부응하여 시내 일원을 장악했던 것이다.

강경경찰과 북한군 6사단 1연대의 전투는 7월 17일부터 18일 오전까지 진행됐다.

1950년 7월 18일 아침 논산경찰서 앞쪽의 강동교(현재 강경과선교)를 두고 강경경찰과 북한군 6사단 1연대 병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김재근 선임기자
1950년 7월 18일 아침 논산경찰서 앞쪽의 강동교(현재 강경과선교)를 두고 강경경찰과 북한군 6사단 1연대 병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김재근 선임기자

17일 날이 새자 경찰은 대대적으로 읍내 일원을 수색했다. 수색조는 오후 1시쯤 금강 인근 옥녀봉에서 거동이 수상한 30여명의 무장대원을 발견했다. 이들은 대한유격대원이라며 신분증을 내보였다. 경찰이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치안국과 연결을 시도했으나 통신이 두절돼 실패했다. 경찰은 이들을 아군으로 여겨 외곽에 배치하고, 아군의 병력 규모와 배치 상황, 암호까지 알려줬다.

그러나 이들은 첩보를 수집하고 전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보낸 전위대였다. 북한군 6사단은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한 터라 전투력도 우수하고 기만전술에 뛰어났다. 이 부대는 개성전투 때도 소련제 T-34전차에 태극기를 달고 국군복장을 한 전위대를 활용하여 시내를 무혈점령한 바 있다.

전위대는 아군의 정보를 입수하여 1연대에 알려줬고, 북한군은 이 정보를 토대로 강경읍을 포위, 경찰을 고립시켰다. 초저녁부터 산발적인 시가전이 벌어졌다. 채운산 정상과 논산천 성동 제방 쪽에서도 새벽까지 전투가 계속됐다.

18일 아침에는 북한군이 시내를 장악하고 강동교와 대흥교를 건너 강경경찰서로 접근했다. 중무장한 북한군은 "동지들을 도우러 왔다. 대표자가 한 사람 나와서 얘기하자"고 외쳤다. 경찰쪽에서 이계봉 경사가 나가 북한군과 대화를 진행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총구를 겨눈 채 경찰서 쪽으로 다가왔고, 대화를 하던 이 경사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속았다! 적이다"라고 외쳤다. 북한군의 총격으로 이 경사가 쓰러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이 인근의 읍사무소 옥상에서 소련제 기관총을 퍼부어 전사자가 속출했다.

□ 화력 월등한 북한군 포위 공격, 전사·포로 속출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성봉 서장은 소강상태가 발생한 틈을 타 후퇴명령을 내린다. 정 서장과 수행요원은 쓰리쿼터, 경찰 병력 30여명은 트럭에 올라 남쪽으로 출발했으나 11시 30분경 강경중학교 인근에 잠복해있던 북한군의 집중사격으로 정 서장을 포함, 다수 병력이 전사했다. 10여명이 북한군에 생포돼 유치장에 끌려갔는데, 유치장에는 이전에 생포된 경찰 2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은 19일 오전 강동교 건너 들판에서 북한군에 의해 처형됐다. 강경전투에서 희생된 경찰병력은 모두 83명이나 됐다.

강경전투에서 승리한 북한군 6사단은 호남의 익산-이리, 김제-삼례, 전주, 남원, 광주-목포, 구례, 순천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8월 3일에는 마산 전면에 나타났다. 15일만에 무려 300km를 돌파한, 기록적인 기동 전투사례로 손꼽힌다. 북한병력이 갑자기 마산에 나타나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25사단을 급파했다. 25사단이 36시간만에 마산에 도착 방어함으로써, 북한군의 부산 진입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강경경찰은 불과 22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막강 북한군 6사단의 남진을 이틀 넘게 지연시킨 것이다.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중장은 "북한군 6사단이 7월 17일 오후 강경에서 적(강경경찰) 여단급(2,000~5,000명) 병력과 조우했다"고 기록했다. 강경경찰의 저항이 워낙 거셌기 때문에 병력 수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 55년까지 대둔산지구 빨치산 토벌에도 앞장

강경전투 전사자의 유해는 경찰에 의해 수습, 안장이 이뤄진다. 9.28 서울 수복 이후 1950년 10월초 강경을 다시 찾은 경찰이 이세환 서장 지휘 하에 사체를 찾아내 함께 묻었고, 강경전투에 참전했던 한효동 순경이 1984년 경찰서장으로 승진, 합동묘지를 성역화했다.

강경경찰은 강경전투 외에도 1950년 10월부터 55년 1월까지 대둔산지구전투경찰대에 참여하여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이 기간 동안 전투경찰대는 국군 및 전북경찰과 합동작전을 펼치는 등 빨치산 사살 2287명, 생포 1,025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경찰과 의용경찰, 민간수비대 등 아군은 1,376명이 희생됐다.

6.25 당시 강경경찰은 북한 최정예 6사단에 맞서 남행을 지연시키고, 수복 후에는 대둔산 빨치산 토벌에 앞장서는 등 주목할 만한 전과를 남겼다.
 

"10월초 경찰서 수복, 곧바로 동료사체부터 찾아"
강경전투에 참전했던 한효동 전 강경경찰서장
강경전투에 참전했던 한효동 전 강경경찰서장

강경전투 생존, 한효동 전 강경경찰서장

"전주에 있다가 7월 16일 저녁 강경에 진입했다. 지방의 부역자들이 준동하여 시내를 장악하고 우익인사를 죽이고 다녔다. 이들을 체포하고 경찰서를 되찾았다."

한효동 전 강경경찰서장(97)은 현재까지 살아있는 강경전투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무선통신을 담당했던 그는 7월 18일 새벽 전투 중에 "통신장비 등을 챙겨 망성면 화산리 교회 앞에서 대기하라"는 정성봉 경찰서장의 명령을 받고 현장을 빠져나와 죽음을 면했다.

"아침에 되니 부상자 등 60여명이 화산리로 후퇴해왔다. 트럭 2대에 타고 경상자는 남원에서 대충 치료한 뒤 김천의 지례, 대구를 거쳐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자신이 6.25때 두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밝혔다. 강경전투에서 한번, 그리고 낙동강전투를 치르면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초 강경경찰 60여명이 경찰서를 수복했다. 치안체계를 확보한 뒤 곧바로 강동교 인근의 강둑과 전답에서 학살당한 경찰의 사체를 수습, 안장했다. 땅을 파지 않고 사체 위에 대충 흙이 덮힌 채 여기저기 묻혀있었다. "

그는 1983년 자신이 총경으로 승진, 강경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뒤 합동묘지 성역화 사업을 펼쳤다.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동료들의 무덤이 초라하게 방치돼있는 게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곁에 묻히는 것이다. 화장을 해서 소박하게… 죽어서나마 함께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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