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무렵 유길준은 과거제도를 비판하면서 "격물진성(格物盡性)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격물한 바와 진성한 바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본래 이용후생의 도에 몽매하니 그 용(用)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어찌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안태(安泰)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백관에서부터 민간의 글방 서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문(과거)으로 부몰(浮沒)하니, 필경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다가 끝내 각성해 깨닫지 못할 것이다"(위키백과)라고 했다 한다.유길준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
신사임당에 대한 일화이다. "새 옷을 빌려 입고 잔칫집에 온 어느 가난한 부인이 하녀가 국물을 쏟는 바람에 치마가 다 젖어 당황해하자 신사임당이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해 보겠습니다' 하더니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룩진 국물 자국이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라고 했다"(위키백과). 신사임당의 에니어그램 성
1875년 무렵 박규수는 개화파 지식인들과 함께 자신이 만든 지구의를 보며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되는데 오늘날 어디에 중국이 있는가"(인물한국사)라고 했다 한다. 당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중국중심주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규수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근심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분노는 자신이 불완전하므로 완벽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생존의 두려움
1884년 10월 12일 갑신정변 5일 전, 고종을 독대한 김옥균이 개혁정부의 당위성을 역설하자 고종은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위키백과)며 신임했다 한다. 김옥균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피암시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현실의 삶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몽상가이다. 낙천적·열정적이며 순진한 경향이 있다. 세상을 실제보다 좋게 보려고 한다. 삶의 지루함을 잊고자 특정 대상에 열광한다. 그는 1851년(철종 2) 충청도 회덕(대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후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이완용·박제순 등을 만난 이상재가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가셔야 겠습니다"라고 함에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다시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닙니까?"(위키백과) 라고 했다 한다. 촌철살인의 조롱이었다. 이상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분노는 자신을 올바름과 완벽함에 집착하게 한다. 옳다는 믿음은 우월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방식을
정조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필로 어제시를 남겼다 한다.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송시열)가 이었으니 송자 또한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다…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위키백과). 송시열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과 소유·공모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가 사회적 규범과 다르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저항한다. 상황을 장악하고
선조가 이이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그는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위키백과) 라고 했다 한다. 이이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의 분노는 진실을 소유한 자신은 옳고, 남들은 그르다고 인식하도록 한다. 옳다는 믿음은 우월
1780년(정조 4) 6월 25일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인 8촌형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떠났다. 이때 마침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에서 피서 중인 청황제를 만나고 그해 10월 귀국하기까지,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적은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는 이 견문록으로 인하여 당시 사대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여러 분야에 대하여 파격적인 문체로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을 조선사회에 소개했다. 그는 청나라에 다녀와서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하며,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상소
1456년(세조 2)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성삼문은 이 기회를 틈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한명회 등에 의해 틀어졌다. 이어 김질의 고변으로 그는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이때 세조가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며 다그쳤다. 이에 그는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
김정희가 일곱 살일 때 그의 집을 지나가던 채제공이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씨를 누가 썼는지 물어보고는 그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인물한국사)라고 하였다 한다. 김정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예술가 또는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와 불굴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높은 수
1418년(태종 18) 6월 초 수 차례의 경고에도 세자(양녕대군)의 일탈이 그치지 않자 태종은 마침내 세자 폐위 의사를 밝혔다. 의정부 대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들도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조판서이던 황희는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인물한국사)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이 일로 4년여 세월을 남원의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황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
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의 일원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박팽년은 거사 계획이 누설되면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의 일화이다."그의 재주를 높이 산 세조가 은밀히 자기를 섬기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며 구슬리자 웃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를 이미 신(臣)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다음은 이원익에 대한 기록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이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관서(關西; 평안도)에 두번 부임했는데 그곳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했다…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치사하고 금천으로 돌아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인조' 12년 1월 29일)'"(인물한국사). 이원익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4월 26일 이미 조령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별다른 기동력도 갖추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실로 엄청난 속도전이었다. 신립이 지휘하는 조선군도 충주 인근에 진을 치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라고 하자, 신립은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했다"('선수실록' 25년 4월 1
야사는 순종에 대하여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 보학(譜學)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 대 손인지 맞히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고 전한다.순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와 경쟁이라는 격정으로
1400년(정종 2)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은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때 정종이 이방간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토산은 동북면에 왕래하는 땅이고,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정종실록' 2년
헌종 대에는 그의 조부인 순조 대부터 이어진 안동 김문과 풍양 조문 간의 세력 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다. "야사에는 한성판윤과 예조·이조·공조판서를 지낸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헌종이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했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헌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행동 방식을 지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일에 열의를 보이며 타인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한다. 세상의 불완전함
"1801년(순조 1) 순조가 '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라며 공노비 6만 5000명을 해방시키라는 명을 내렸다…말년에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자 순조는 '우리가 백성들 먹여 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 게 없는가'라고 탄식하며 왕권으로 김노경(추사 김정희의 부친) 등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순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1454년 11월 25일의 실록은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경복궁 자미당(세종이 말년에 거처했던 곳) 난간을 보더니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단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의무·온화함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지침, 규율, 기준을 알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안내할 훌륭한 권위를 찾기도 한다. 이 권위는 사람, 사고시스템, 지
문종에 관한 일화이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輪對,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박영규, 2014).이런 기록도 있다. "무기 제작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던 신숙주가, '주상이 숭상하는 것을 만인이 숭상하는 바이니 주상께서 무(武)만 숭상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무(武)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라고 문종에게 말하자, '군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라며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