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13) 고려조의 스님들

고려조 개태사는 고려왕실의 후원 아래 당대의 고승대덕이 주지하며 설법을 펼쳤고, 국내외 불경과 장소(章疏)가 집결된 연구와 출판 기능까지 갖춘 화엄학의 성지였다.               장길문 기자
고려조 개태사는 고려왕실의 후원 아래 당대의 고승대덕이 주지하며 설법을 펼쳤고, 국내외 불경과 장소(章疏)가 집결된 연구와 출판 기능까지 갖춘 화엄학의 성지였다. 장길문 기자
태조 왕건의 어진이 봉안된 개태사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진전 사찰이었다. 왕실에서 시종 큰 관심을 가졌고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실에서 챙기는 화엄종 대형 사찰이 지방에도 산재했는 데 개태사도 그중 하나였다. 학문과 수행을 두루 섭렵한 스님들이 주지를 맡았고 당대의 교종을 대표하는 승통이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

맨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승담과 윤언이다. 왕건이 개태사 낙성에 즈음하여 직접 지은 `신성왕친제화엄법회소`에 두 스님의 이름이 나온다. 왕건은 "화엄의 도량으로서 스님들의 연총(淵叢)으로 진작하기 위해 지난 번에 윤언과 승담 두 대덕을 청해 주지하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윤언과 승담은 고승 대덕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 2명은 개태사 최초 스님이자 주지로 평가할 만하다. 개태사를 매우 중하게 여겼던 태조는 절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들 대덕을 보내 관리하게 하고 불도를 펼쳤던 것이다.

고려 초 의상의 화엄종 계보를 이은 균여(923-973년)도 개태사와 인연이 깊다. 해동의 화엄은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에서 시작하여 신라 말 희랑과 고려 초 의순을 거쳐 균여에게로 맥이 이어진다.

균여는 중국과 신라 화엄의 대가인 지엄과 의상, 법장의 사상에 정통했고 그들의 저서에 주석을 붙였고 `법계도원통기`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석화엄지귀장원통초` `화엄삼보장원통기` `십구장원통기` 등이 현존한다. 균여의 저술이 고려대장경에 새겨져 오늘에 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곳이 개태사다. 그의 법설은 제자들에 의해 개태사를 비롯 계룡산 갑사, 귀법사, 법수사 등에 보관됐다.

`석화엄교분기원통초`는 균여(원통)가 법장의 `화엄오교장`을 풀이한 것이다. 959년(광종 10년)에서 962년까지 마하갑사와 법왕사에서 강설한 것을 제자인 이원과 혜장이 각자 기록하여 개태사에 보관했다. 고종 때 개태사에 머물렀던 천기 스님이 이들 사본을 발견하여 교정했고 그 제자들이 1251년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였다.

`석화엄지귀장원통초`는 균여가 법장이 지은 `화엄지귀장`을 해석한 것으로 균여 입적 후 14년 후인 987년에 방언으로 필사돼 개태사 고장에 보관됐다. 1234년 천기가 발견하여 강의했고 천기가 죽은 뒤인 1248년 한문으로 바꾸어 간행됐다.

균여는 개경의 영통사에서 공부한 뒤 광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개경의 귀법사와 불일사, 경북 성주의 법수사, 연산 개태사에서 화엄종풍을 떨친 것으로 나와 있다. 특히 개태사는 그의 주요한 저서가 집중적으로 보관됐다. 그의 생전은 물론 사후 정리된 필사본의 대부분이 이곳에 보관됐다.

균여의 저서가 개태사에 집중적으로 보관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호남과 호서를 아우르는 대가람으로 숱한 고승들이 머무르며 법회를 열고 설법을 펼쳤다. 승려들이 불법을 배우고 연구하는 대강원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불경과 그것을 풀이하고 해석한 장소(章疏)도 이곳에 속속 집결됐다.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제작을 주도한 수기스님이 이곳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책이 매우 귀하던 시절 고려 왕실이 세운 개태사에는 국내외 수 많은 서적이 집결됐고 빼어난 승려들이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됐던 것이다.

천기는 균여의 저술들을 찾아내 그것으로 직접 강의도 하고 방언을 빼내는 등 교감과 정리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개태사는 신라의 의상에서 비롯된 해동 화엄종이 희랑-의순-균여-수기-천기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원명국사 징엄(1090-1141년)도 개태사 주지를 지낸 고려 초기 대표적 승려다. 숙종의 넷째 아들로 예종이 그의 형이다. 화엄학에 정통했으며 1105년 승통이 되고, 예종 때 홍원사·개태사·귀신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징엄은 이자겸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1122년 오교도승통으로 올라 인주 이씨와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영통사에 스승이자 숙부인 의천의 비(碑)를 세우려다가 좌절된 것이다. 화엄종의 맥을 잇고 천태종을 세운 의천의 비를 세우려하자 법상종 세력인 이자겸과 그의 아들인 현화사의 의장이 반대했다. 징엄이 의천의 비를 세운 것은 이자겸이 몰락하고 개경으로 올라와 흥왕사 주지로 있던 1138년 경이었다.

징엄은 지방에 머물다 이자겸 세력이 제거된 뒤 개경에 돌아와 흥왕사에 10여년 머물다 1141년 입적했다. 징엄이 개경에서 말년을 보낸 것을 감안하면 개태사 주지를 지낸 시기는 이자겸의 횡포가 심해 지방에 머물던 1122-1131년 사이가 유력해 보인다.

정각 김영소(1115-1188년) 스님도 개태사에서 불도를 펼쳤다. 17세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21세에 광교사 주지가 되었다. 매우 젊은 나이에 주지가 된 것이다. 32세에 삼중대사, 39세에 수좌, 56세에 승통이 되었다. 세 차례나 왕의 명을 받아 귀신사, 개태사, 해인사에서 설법하니 명종이 그의 가르침을 기다렸다고 한다.

정각이 9곳의 주지를 역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의 주지를 지냈을 가능성도 크다. 그의 업적을 기록한 `고려국 흥왕사 교학 영통사 주지 정각승통 영소 묘지명`이 전한다.

개태사와 관련 고려조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게 인혁대사다. 개태사 승려인 인혁대사는 1218년 `대일경등일대성교제경중소설일체비밀다라니`라는 범서총지집(梵書總持集)을 펴냈다. 목판으로 찍은 이 책은 595종의 진언을 수록했다. 진언은 석가의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신성하고 주술적 힘을 가진 어구를 말한다. 한·중·일에서는 산스크리스트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금산사의 요청으로 개태사에서 책을 펴냈고 편집과 판각을 인혁대사가 총괄했다. 인혁대사가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진언을 정리하고 편집해낼 정도로 정통했기에 가능했다.

개태사를 거쳐 간 승려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개태사는 고려조 내내 성세를 누렸고 조선 초까지 대략 500여 년 동안 해동 화엄의 정통의 맥을 이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승담과 윤언, 균여, 징엄, 정각, 수기, 천기 스님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이 예불을 올리고 불경을 익혔다.

개태사는 해동 화엄의 성지였다. 언제나 당대 최고의 승려들이 주지했고 부처가 되려는 승려와 중생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천호산 자락 아래 강원에는 늘 삼장을 익히고 연구하는 열기가 가득했고, 학업을 돕고 부처의 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인쇄와 출판 기능까지 갖췄다. 개경은 물론 송나라와 거란의 불서까지 두루 모은 도서관도 운영됐다. 수만리 서쪽 먼 나라에서 세월을 격(隔)하여 살다간 석가모니의 미소가 해동의 한 모서리 천호산 아래 피어올랐다. 그곳은 땅 위의 모든 생명과 중생과 운수납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부처의 넓은 품이었다. 개태사는 화엄의 꽃이 만개한 무량(無量)의 바다였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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