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1) 936년 후삼국 통일의 그날

충남도 문화재자료 274호 개태사 오층석탑. 기단부가 멸실됐지만 백제계의 흐름을 계승한 고려 초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김재근 기자
충남도 문화재자료 274호 개태사 오층석탑. 기단부가 멸실됐지만 백제계의 흐름을 계승한 고려 초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김재근 기자
후삼국이 통일되고 전승을 기념하여 개태사를 창건한 지 1074년이 흘렀다. 1930년대 오랜 세월 폐사지로 방치됐던 옛터에 다시 가람이 들어선 뒤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000년 사찰 개태사의 역사와 문화를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신검 "백제를 바칩니다!"=936년 9월 어느 날. 황산은 말 그대로 누렇게 물들고 들판에는 오곡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성(馬城)의 장대(將臺)에 오른 왕건은 한차례 크게 심호홉을 한 뒤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옆에는 박술희와 유금필·김철·왕순식 등 맹장들이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왕건은 힐끗 견훤을 훔쳐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들 신검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에 불타올랐지만 지금은 담담하고 체념한 표정이었다. 중군의 한 지휘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폐하! 저기 신검의 무리가 보입니다. 창검을 버리고 이리 오고 있습니다."

왕건이 견훤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상부(尙父)님, 어떻게 하지요?"

왕건은 견훤이 귀부해온 뒤 상부라고 높여 불렀다.

"…."

견훤은 뭔가 말을 할 듯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내 뜻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알아서 하라는 듯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 마음대로 할 것이면서 뭘 물어보느냐고 항의를 하는 듯했다.

잠시 후 후백제 2대 왕 신검이 동생인 양검과 용검, 40여 명의 장수·관료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일리천 싸움 이후 황산벌까지 정신 없이 도주만 했던 터라 핏기가 가신 얼굴에 아무 기력도 없었다. 칼과 창과 활을 버린 장수들은 아무 말 없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폐하 백제를 바칩니다! 장수와 백관들의 목숨도 모두 내놓겠습니다."

신검은 왕건 앞에 엎드린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왕건은 다시 한번 견훤의 얼굴을 바라봤다. 견훤은 눈을 감고 눈앞의 광경을 외면했다. 왕건의 칼 아래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세 아들과 백제의 장수들을 보고싶지 않았다. 자신이 30여 년 동안 흙을 벤 채 잠자고 바람에 머리를 씻으며 닦아온 백제의 왕업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반신 능환의 목을 베다=이날 가장 크게 단죄를 받은 인물은 신검의 책사인 능환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은 이렇다.

`(왕건이) 능환을 책망하여 가로되 "처음 양검 등과 함께 역모를 꾸며 임금(견훤)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운 자는 바로 네 놈이었다. 신하의 의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꾸짖자 능환이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처형하도록 명했다.`

왕건은 승장으로서 조목조목 전장을 갈무리했다. "백제의 병사 중 누가 기꺼운 마음으로 싸움터에 나왔겠는가? 포로 3200명은 모두 살려 보내 생업에 종사토록 하고, 이곳 백성들을 절대 약탈하거나 해치지 말라. 그리고…. "

왕건은 견훤을 의식한 듯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신검! 네놈은 아비를 가두고 참람되이 왕을 칭했으니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다. 허나 능환과 아우들의 꼬임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종국에 군사와 신료들을 데리고 항복하여 살육이 그치도록 했으니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처자와 함께 여생을 보내도록 벼슬도 내리겠다."

어둠이 내리면서 잔치가 벌어졌다. 배 불리 먹은 병사들은 큰 소리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왕건의 막사에 둘러앉은 장수들은 서로 전승을 축하했다.

견훤에게 연거푸 술잔을 권한 왕건이 일리천 싸움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일리천 싸움은 고려와 백제의 운명을 가른 최후의 대전이었다. 9년 전 왕건은 공산(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경애왕을 죽이고 철수하는 견훤의 군사를 맞아 맞붙었지만 대패하여 김락과 신숭겸 등이 죽고 왕건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쳤다.

935년 3월 후백제는 견훤 일가의 내분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배다른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 뒤 정권을 장악한다. 견훤이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낌새를 눈치채고 신검이 능환 및 친동생인 양검·용검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분노한 견훤은 막내아들과 애첩을 데리고 왕건에게 달아난다. 견훤의 뒤를 따라 사위인 박영규도 고려에 사람을 보내 귀순을 청한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에 도착, 나라를 통째로 왕건에 바쳤다.

때를 기다리던 왕건은 936년 9월 8만 75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때마침 견훤이 자신의 아들 신검을 처단하게 해달라며 출병을 요청한다.

왕건의 대군은 천안을 거쳐 일리군(경북 선산)의 한 냇가에서 신검의 군대와 마주친다. 그러나 전투는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난다. 싸움이 시작되자 신검군의 효봉·덕술·애술·명길 등이 옛날 주군이었던 견훤의 말 앞에 달려와 투항했다. 왕건이 공훤을 선봉으로 삼아 협공하니 신검군은 크게 무너졌다. 백제 병사 5700명을 죽이고 3200명을 사로잡았다. 신검은 패잔병을 이끌고 황황히 후백제 땅인 황산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탄령을 넘어 마성에 이르러 추격해온 왕건에 항복하기에 이른다. 군대를 수습하여 싸워보려 했지만 일리천 싸움에서 너무 많은 병력을 잃고 전의도 완전히 꺾였던 것이다.

◇"승리는 부처와 천지신명의 덕"=왕건은 전공을 따져 장수와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큰 잔치를 열었다. 인근 마을에도 곡식과 고기를 나눠주고 잔치를 베풀었다. 겁먹은 채 고려군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이제 전쟁이 끝났다! 삼한 땅에서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처의 힘과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백제를 이겼다. 승리를 거둔 이곳에 대찰(大刹)을 세우라!" 기쁨과 감격에 겨운 왕건의 목소리가 황산의 골짜기와 들판에 퍼져나갔다. 오랜 병란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수 많은 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전율했다. 왕건은 승리한 군대를 이끌고 고려의 기치를 휘날리며 후백제의 왕도 완산주(전주)로 향했다. 황산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아들의 목을 베지 못한 견훤은 화병으로 등창이나 며칠 뒤 숨을 거뒀다. 난세의 호걸 견훤이 삶을 마감한 곳은 황산의 조그만 사찰이었다. 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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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연산면 개태사 전경. 뒤쪽이 천호산 자락이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세운 전승 기념 개국 사찰로 936년에 착공,940년에 완공됐다. 현재의 도량은 개태사 옛터에 새로 세운 것이다.  장길문 기자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 전경. 뒤쪽이 천호산 자락이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세운 전승 기념 개국 사찰로 936년에 착공,940년에 완공됐다. 현재의 도량은 개태사 옛터에 새로 세운 것이다.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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