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9) 성쇠와 흥망의 기록들(上)

원감국사 충지는 고려 최고의 승려 시인으로 개태사에서 숙박한 뒤 시를 남겼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원감국사 충지는 고려 최고의 승려 시인으로 개태사에서 숙박한 뒤 시를 남겼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매사 성쇠와 흥망이 있다. 나라도 그러하고 기업도 집안도, 나무와 풀도 솟아오르고 기울기도 한다. 고려조 사찰들이 그러했다. 고려시대 승려를 위한 과거까지 도입됐고 사찰마다 풍요를 누렸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에 "개태사를 지을 때에도 사치가 극도에 이르고, 손수 소문(疏文)을 짓고 중들을 많이 모아 낙성하기까지 하였다"고 나와 있다. 태조 왕건이 엄청난 국력을 기울여 개태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개태사 관련 기록은 `범서총지집`이라는 서적 발간이다.

1218년 개태사에서 목판으로 비로자나성불경 등 진언을 담은 책을 인쇄한 것이다. 진언(眞言)은 부처나 보살에게 호소하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외우는 주문을 말한다. 개태사에서 범서총지집을 목판 인쇄한 것은 의미가 크다. 전문적으로 책을 펴낼 수 있는 편집과 교감, 판각, 인쇄, 제본 관련 전문 인력과 시설이 있었다는 뜻이다. 호남의 대표적 가람인 금산사가 출판을 의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개태사는 13세기 후반 고려조 승려 중의 최고 시인으로 손꼽히는 원감국사 충지의 시에도 등장한다. 1276-1277년 사이 `3월 24일 천호산 개태사에 자며`라는 시를 쓴 것이다.

지난해에 세 번 천호산을 지났나니

천호산 가운데는 흰 구름이 희더라.

흰 구름은 산중에서 한가하다고 자랑하며

아마 산으로 지나가는 먼 손을 보고 웃

으리라.(중략) <한국고전번역원>

당시 송광사에 머물던 충지는 개경을 오갈 때마다 개태사를 들렀다. 충지는 조계종 6세 조사가 된 고승이다. 고려시대 혜심 등 승려들이 남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충지의 시가 가장 우수하다.

14세기 후반부터 개태사는 홍건적과 왜구 등의 외침과 관련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 고려 말 홍건적이 2차례나 침입하고 왜구는 수시로 출몰하여 국토를 유린했다. 이러한 위기에 권신과 신진세력이 대두했고 이들의 위세 앞에 고려 왕실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다.

첨의평리 이인복을 개태사 태조 진전으로 보내 강화에 도읍을 옮기는 일의 길흉을 점치게 했는데 불길하다는 괘가 나오자 천도를 중지했다. <고려사> 공민왕 11년(1362년)

초하루 임인일. 왕이 계속 청주에 머물렀다. 삼사우사 이인복을 개태사 태조의 진전에 보내 환도의 길흉을 점치게 했는데 길하다는 괘가 나왔다. <고려사> 공민왕 12년(1363년)

이들 기록은 홍건적의 고려 침입과 관련된 것이다. 1차 침공은 1359년 12월 있었다. 2차 침공은 1361년 11월에 일어났는데 홍건적은 불시에 청천강을 건너 고려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점령했다. 고려는 20여만의 병력으로 이듬해 1월 개경을 탈환했다. 이인복이 개태사에서 강화 천도를 점친 것은 2차 침공 직후다. 개경을 점령했다가 물러난 홍건적은 만주에 머무르며 고려 재침을 노렸다. 공민왕은 과거 몽고군과 싸우기 위해 강화도에 피란한 것처럼 도읍을 옮기려 했다. 왕은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천도를 중지했다.

이듬해 1월 이인복을 개태사에 보내 환도를 점치게 한다. 공민왕은 점괘에 따라 1263년 2월 청주에서 개경으로 돌아온다. 이인복이 뽑아낸 점괘는 강화 천도를 막고 개경 환도를 결정하는 분수령이었다. 고려왕실이 개태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도 알 수 있다. 점을 쳐서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던 것이다.

개태사를 찾아 2차례나 국가 중대사를 점친 이인복도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강직하고 충직했고 공민왕이 매우 신뢰했다. 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라고 간했다가 파직당할 정도로 대가 셌다. 조일신이 난을 일으켰을 때 공민왕이 이인복에게 상의했을 정도였다. 이런 신임이 있기 때문에 그를 개태사에 보냈고 그의 점괘대로 국사를 결정했던 것이다.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왜구가 공주와 양광도를 함락시키니 원수 박인계가 전사하였다. 이때 왜구가 남쪽 지방에 횡행하여 마침내 부여로 쳐들어와 공주를 함락하고 다시 석성·연산을 침략하므로, 박인계가 맞아 싸우다가 말에 떨어져 피살되니 적은 개태사를 도륙했다. <동사강목> 우왕 2년(1376년)

왜적이 연산현 개태사를 침범하였다.<고려사절요> 우왕 4년(1378년)

왜구의 개태사 침입 관련 기록들이다. 왜구가 개태사를 자주 약탈한 것은 개태사의 위상 및 상징성 때문이다. 고려 태조가 지은 진전사찰로 규모도 컸을 뿐 아니라 지역의 건축을 대표했고, 이 때문에 늘 왜구의 공격과 약탈이있었다. 위 기록 가운데 1376년 우왕 2년의 개태사 침공은 최영의 홍산대첩과 연결된다. 왜구는 공주와 부여 석성, 논산 연산을 차례로 함락하고 개태사까지 진출했다. 양광도원수 박인계의 전사는 개태사의 참변을 불렀다. 왜구가 승려 등을 무참하게 죽인 것이다.

`동사강목`에는 이 상황을 `도개태사(屠開泰寺)`라고 적었다. `도(屠)`는 도륙하다라는 뜻으로 참혹하게 마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최영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60세에 자진 출정하여 홍산(충남 부여)에서 적을 대파했다.

고려조에서 개태사의 마지막 기록은 공양왕 3년(1391년) 좌대언 이첨을 파견한 내용이다. 이첨은 개태사 태조 진전에 제사를 올리고, 옷 한 벌과 옥으로 만든 허리 띠 한 개를 바쳤다. 이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이첨이 개태사 진전에 제사를 올리고 옷과 옥대를 바쳤다는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옥대와 옷을 바친 것에 주목한다. 개경의 봉은사처럼 개태사에도 태조의 어진과 청동으로 만든 주상(鑄像)이 함께 있었다고 해석한다.

이첨을 보낸 시점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당시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 둘러싸여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처지였다. 고립무원의 위중한 때 왕실에 충성하는 이첨을 개태사에 보내 태조 진전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첨이라는 인물도 흥미롭다. 홍성 출신의 이첨은 고려 말 조선 초 격변의 중심에 섰던 인물 중의 하나다. 당대의 권력자인 신돈의 명을 거부했고, 권신 이인임을 탄핵했다가 역풍을 맞아 10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던 김진양 사건에도 가담, 유배길에 올랐다.

고려 국왕의 최측근이나 고승대덕, 충신들이 개태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태조가 통일 후 처음 직접 명하여 세운 가람인데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사찰로 왕실을 상징하는 성소(聖所)였기 때문이다. 호서와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했다. 광종이 존경했던 균여대사나 고려대장경 조성을 총괄한 수기승통, 원명국사 징엄 등은 왕실에서 직접 챙긴 당대의 고승이었다. 공민왕이 천도와 환도를 점치게 한 이인복, 공양왕이 옥대와 옷을 바치게 한 이첨도 고려 왕들이 절대 신임한 신료였다. 노구를 이끌고 개태사를 도륙한 왜구를 토벌한 최영도 고려의 충신이었다. 개태사와 고려 왕실의 깊고 오랜 운명이고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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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1376년 왜구가 개태사의 승려를 도륙하자 자원 출전하여 홍산(부여)에서 적을 대파했다.
최영은 1376년 왜구가 개태사의 승려를 도륙하자 자원 출전하여 홍산(부여)에서 적을 대파했다.
동서강목 우왕 2년 기록에 왜구가 개태사를 침입, 승려 등을 도륙했다고 적혀있다.
동서강목 우왕 2년 기록에 왜구가 개태사를 침입, 승려 등을 도륙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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