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8) 소중한 문화재들(下)

개태사의 금고(金鼓)는 청동제 북으로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했다. 고려시대 쇠북 중에서 가장 크다.  사진=부여박물관 제공
개태사의 금고(金鼓)는 청동제 북으로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했다. 고려시대 쇠북 중에서 가장 크다. 사진=부여박물관 제공
찬란하고 거룩하고 위대하도다 붓다여!

`걸작`이라는 표현이 있다. 보는 순간 아름답고 빼어나고 견줄 데 없는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국보 제213호 금동대탑이 그러하다. 공식 명칭은 금동탑이지만 학자와 불자, 예술가들은 `금동대탑`이라고 부른다. 금동탑 가운데 가장 크기도 하거니와 견줄 데 없이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개태사 옛터에서 나온 금동대탑은 10세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고려 기술과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고려의 하이테크와 장인의 예술 감각, 붓다를 그리워하는 깊은 믿음이 어우러져 탄생한 세기의 작품이다. 금동대탑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1000년 넘도록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원형에 가깝게 땅 속에 보존된 것은 부처의 가호 덕분이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이 없다. 거죽에 입힌 얇은 금칠이 수 백 년 동안 보호막을 형성하여 청동의 부식을 억제해준 것이다. 땅 아래 묻힌 덕분에 오히려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도 기막힌 역설이다. 땅 위에 존재했다면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힘센 권력자나 돈 많는 부호, 또는 도적에게 흘러가거나 이곳을 침탈했던 왜구가 일본으로 가져갔을 수도 있다.

금탑이 아닌 금동탑이었던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고려조에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금탑`이 2개 있었지만 지금은 기록만 전한다. 모두 왕실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사찰에 봉안됐던 것들이다. 그 하나는 개경 흥왕사 금탑이다. 1223년 무인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황금 200근으로 13층 탑과 꽃병을 만들어 헌납했다. 다른 하나의 금탑은 국청사에 있었다. 1104년 인예태후가 아들인 선종에게 청하여 13층 금탑을 만들도록 했다. 이들 두 개의 탑은 쌍벽을 이루며 명성을 떨쳤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실의 위세와 황금의 화려함에 힘입어 이름을 떨쳤던 흥왕사와 국청사 금탑은 행방이 묘연하다. 이에 비해 소박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사랑을 받았던 금동대탑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한다. 부처의 뜻이 그윽하고 깊음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호화를 다한 금탑보다는 수수하고 영험스런 탑을 더 중히 여긴 까닭이 아니겠는가?

금탑보다 100여년 앞서 만들어진 금동대탑은 일류 장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높이가 155㎝로 국내 금속제 탑 가운데 월등하게 크다. 금동탑(청동탑)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제작돼 40여 개가 전하는 데 높이가 대개 20~30㎝이고 50㎝가 넘는 것은 3개에 불과하다. 금동대탑은 망실된 것으로 보이는 위쪽 2개 층과 상륜부 생략된 부분까지 더하면 200㎝가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인다.

개태사 금동대탑은 기단·탑신·상륜부로 구성된 전형적인 석탑 양식과 기와지붕과 대문·창살·두공(頭工) 등의 목탑 양식을 함께 갖췄다. 석탑 연구는 물론 현존하지 않는 고대 목탑 연구의 귀중한 기초 자료다.

탑의 기단은 2단으로 돼있다. 아래층 기단은 3칸으로 나누고 가운데 칸에 1층탑에 오르는 계단을 설치했다. 1층 탑신에는 주심포와 무쇠장식이 붙은 두 짝의 띠창살을 표현했다. 2~5층의 탑신에는 4면마다 기둥 사이에 여래좌상을 배치했는데, 2층에는 4구씩, 3층과 4층에는 3구씩, 5층에는 2구씩 새겼다. 기둥의 맨 위 머리 부분에 두공을 설치하여 불상을 입체적인 전각에 봉안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상층 기단과 1~5층 탑신에는 난간이 둘려졌고 이곳에는 모란당초문이 장식돼 있다. 옥개(지붕)의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추녀의 모서리 끝은 위로 날렵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추녀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고 추녀 마루에는 보주와 용두 등의 잡상을 올려놓았다.

미술사학자나 건축학자들은 개태사 금동대탑을 `걸작`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가로와 높이의 균형이 잘 잡혔고 추녀의 곡선과 처마의 솟아오름이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듯 자연스럽고 유연하다. 탑의 기단이나 몸체에 새겨진 기둥과 안상(眼像)·두공·모란당초문·여래좌상도 매우 정밀하다. 화려하되 경박하지 않고, 정교하되 잡스럽지 않으며, 성스럽되 도식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웅장하되 투박하지 않으며 세밀함도 두루 갖췄다. 시주자가 내놓은 정재(淨財)와 장인의 빼어난 기술, 개태사 승려와 신도들의 깊은 불심이 어우러져 고려조 최고 걸작이 태어난 것이다.

아쉽게도 이 걸작은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이 소유하고 있다. 1960년대 초 누군가가 개태사 옛터에서 찾아내 팔아넘긴 것이다. 개태사가 소송을 제기했지만 2011년 패소했다. 탑의 제작연도, 제작자, 소유자, 보관 장소 등에 관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매사 인연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폐사된 지 수 백 년 지나 다시 도량이 세워진 것에서 보듯 개태사는 부처의 인연이 길고 무한한 곳이다. 부처가 오랜 세월 땅 속에서 고생한 탑에게 번화한 세상도 구경하고 잠시 쉬라고 하는 듯하다.

개태사 금고(金鼓)도 자랑거리다. 금고는 청동으로 만든 북이다.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한다. 천호리 주민들이 주택개량 사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으며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직경이 102㎝로 고려시대 쇠북 중에서 가장 크고 무늬와 장식을 새긴 수법도 뛰어나다.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개태사의 영화를 상징하는 법구(法具)가 아닐 수 없다.

고려시대 철확(鐵확)도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끄는 유물이다. 직경 289㎝. 높이는 96㎝, 둘레는 910㎝로 고려조에 만들어진 무쇠솥 중에서 가장 크다. 영예롭게도 충남도 민속자료 제1호다. 이곳에서 상주하던 승려와 법회에 참석한 수천 신도들의 배를 채워주는 소중한 솥이었다. 거대한 무쇠솥 역시 개태사의 영화와 융성을 말해준다.

삼존석불과 청동대탑·석탑·공양상·수조·철확·금고 등은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재들이다. 고려 왕실이 개태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청동대탑과 금고, 철확 세 가지는 고려시대 당시 최대 크기였다. 웅장한 삼존석불도 고려 초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태조 왕건의 어진과 청동상까지 있었으니 개태사는 말 그대로 고려 최고의 사찰이었던 것이다.

태조 어진(청동상)과 삼존석불, 금동대탑은 개태사 3보(寶)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한데서 비바람과 추위에 떨었던 삼존석불은 극락전 대들보 아래 미소를 짓고 있고, 지난해에는 태조 어진이 제작돼 봉안됐다. 붓다여 굽어 살피소서! 금동대탑이 제자리를 찾고 중생들이 하늘의 구름처럼 바다의 물결처럼 천호산 자락에 굽이칠 수 있도록…. 김재근 논설위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충남도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 철확(鐵확). 직경 289㎝. 높이 96㎝, 둘레 910㎝로 고려조 최대 무쇠솥이다.  사진=장길문 기자
충남도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 철확(鐵확). 직경 289㎝. 높이 96㎝, 둘레 910㎝로 고려조 최대 무쇠솥이다. 사진=장길문 기자
국보 제213호 개태사 금동대탑은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금동탑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걸작이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사찰 개태사의 위상을 말해주는 문화재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국보 제213호 개태사 금동대탑은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금동탑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걸작이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사찰 개태사의 위상을 말해주는 문화재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관련기사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