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12) 설화와 민속, 문화

관촉사 미륵보살상(보물 제218호)은 개태사 무쇠솥, 강경 미내다리와 더불어 논산 사람들이 이승에서 꼭 구경해야 할 3가지 볼거리로 일컬어져 왔다.
관촉사 미륵보살상(보물 제218호)은 개태사 무쇠솥, 강경 미내다리와 더불어 논산 사람들이 이승에서 꼭 구경해야 할 3가지 볼거리로 일컬어져 왔다.
개태사 주변에는 `얘기`가 많다, 고려 태조 왕건 때 창건한 이래 1000여년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숱한 전설과 설화, 민속이 생겨났다. 사람이 살았던 어느 곳에나 역사와 얘기가 머물 듯 개태사와 인연이 닿는 연산과 논산의 산과 내, 마을에는 신이(神異)하고 흥미로운 얘기가 전한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얘기들이 백성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긴 세월 맥을 이어온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려고 연산에 머물 때 꿈을 꾸었다. 삼목(三木)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는 큰 솥을 인 채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이었다. 왕건은 마침 점을 잘 치는 노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가서 물었다.

노파는 "크게 길할 조짐입니다. 나무 세 개를 등에 진 것은 임금 왕(王) 자를 말하는 것이고, 큰 솥을 머리에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며, 깊은 물에 들어간 것은 용왕을 본 것입니다"라고 점괘를 풀이했다. 태조는 후백제군을 무찌르고 삼한을 통일하자 노파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그 거처하는 주변에 밭을 하사했다.

논산시 부적면 부인리에 전하는 설화다. 왕건이 조영부인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땅을 하사했는데 오늘날 부인리 전체가 그 땅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노파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사당을 짓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냈다. 현재 부적면 부인2리에는 부인을 모신 부인당(夫人堂)이 있고 제물을 충당하는 `지밭`이 있다. 지밭은 제밭(祭田)이 변한 말이다. 부인이 거처했다는 의미로 부인리라 하고, 면 이름을 부인처면(夫人處面)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인당 안에는 조영부인신위가 있다.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고 삼국통일을 이뤘다는 천명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가 자리 잡은 천호리와 화악리 느티나무에도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지은 뒤 사찰 건축에 공이 많은 두 사람에게 각각 묘목 1그루 씩 줬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이 나무를 각각 천호리와 화악리 입구에 심고 정성스레 길렀다. 형은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도 아이가 없었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아이를 점지하고 사라졌다. 그 뒤 아내가 잉태하여 옥동자를 낳았는데 훗날 나라의 큰 인물이 됐다. 동생이 가꾼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쳤다. 왜군들이 개태사의 석불을 부수는 등의 난행을 일삼고 나무 밑에서 잔치를 벌이다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왜장과 병사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칠월 칠석날 느티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아이를 낳게 하는 신령한 신목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가 위치한 마을이 `옥녀동`으로 불리는 지명 유래 이야기도 전한다.

통일을 이룬 왕건이 이곳에서 군사들과 야영하며 잔치를 벌였는데 왕건의 꿈 속에 천호산 선녀가 꽃마차를 타고 내려와 통일 대업을 축하하고 밤 늦도록 함께 놀다가 승천했다. 왕건이 개태사 대사에게 물으니 "하늘이 대왕을 돕겠다는 계시"라고 대답했다. 왕건이 크게 기뻐하며 이곳을 옥녀동이라 부르도록 명해, 이때부터 개태사 인근을 옥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건이 천명을 받아 고려를 세우고 통일을 이뤘음을 과시하는 이야기다.

개태사의 상징인 삼존석불도 주민들 사이에 왜적을 물리친 신이(神異)한 힘을 가진 영물(靈物)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몰려와 절간 문을 열어젖히고 행패를 부렸는데 왜병이 대웅전 문을 열자 삼존석불로부터 불빛이 쏟아져 나와 눈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왜장이 다시 개태사에 난입하여 칼로 관세음보살을 내려치려는 순간 이상한 불빛이 일면서 칼이 부러지고 왜장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내용이다.

개태사 무쇠 솥에 얽힌 얘기도 재미 있다. 어느 날 스님이"어느 해 대홍수가 날 터이니 큰솥으로 미륵삼존석불을 막으면 삼존석불만은 안전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선승이 말한 해가 되자 대홍수가 났다. 스님과 백성들은 가마솥으로 삼존석불을 덮치려는 물을 막았다. 솥뚜껑은 떠내려갔지만 삼존석불만은 온전했다. 홍수가 지나간 뒤 고을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히면 논에서 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개태사 솥뚜껑에서 나는 소리다"라며 솥뚜껑이 어디엔가 묻혀 마을을 지켜 준다고 여겼다고 한다.

스님과 마을 사람들은 선승의 예언대로 홍수가 났을 때 큰 솥으로 삼존불을 보호하자 장마에 떠내려간 솥뚜껑이 땅 속에 묻혀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개태사 무쇠 솥은 이미 조선조 때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노선 선조 인조 때의 문신 설정 조문수는 그의 시에서"만고에 누가 이것이 신령한 물건인 줄 알까/이미 우레와 비를 부른 후에 다시 맑게도 하는구나"라고 읊었다. 숙종 영조 때 문인이자 화가였던 담헌 이하곤도 그의 글에서 "이 절에는 아주 큰 철 솥이 있는데, 연산향교 앞에 옮겨져 있었다. 가뭄이 들면 이것을 이동시켜 우레와 비를 이르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관촉사 은진미륵, 강경 미내다리와 얽힌 얘기도 재미있다. 예로부터 논산과 연산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이르면 "생전에 개태사 큰 솥과 강경 미내다리, 은진미륵을 봤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논산 사람이라면 이승에서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을 당연히 보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이곳 백성들에게 개태사 큰 솥은 미내다리, 은진미륵과 더불어 그만큼 뚜렷하고 큰 존재였던 것이다.

세칭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역사, 불교사, 미술사적으로 개태사와 아주 밀접하다.

관촉사 불상(보물 제218호)은 개태사 삼존불의 흐름을 잇는 거대 불상이다. 관촉사는 고려 초기인 968년(광종 19년)착공, 1006년에 완공됐다. 불상은 968년 조성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촉사 미륵보살상은 개태사 삼존불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이다. 높이가 무려 l8.12m로 고려시대 최대 크기다. 고려 초기 충청권에 조성된 부여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당진시 안국사지 석불입상도 같은 흐름의 작품이다. 투박하고 위압적이고 토착성이 강한 불상이다. 새 왕조인 고려가 웅장하고 위압적인 불상을 세워 신생국가의 힘을 과시하고 민심을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개태사는 유아독존 홀로 존재해온 가람이 아니다. 940년 완공된 이후 수많은 승려들이 공부하고 참선하며 불법을 전파했고 중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조선조 500년 배불과 척불 정책 탓으로 폐사가 됐지만 부처의 자비와 광명은 백성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졌다. 주민들은 비록 개태사는 사라졌지만 삼존불과 무쇠 솥을 이적(異蹟)을 행하는 영물로 여겼다. 아이를 낳게 하고, 왜적을 물리쳤으며, 탐욕스런 수령을 혼내주는 전능한 존재였다. 거기에 거룩한 불심이 녹아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태사는 단순한 가람이 아니었다. 고려 조선조 이 곳 사람들의 신앙과 삶과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천호산 자락 아래 우뚝 선 삼존불의 미소는 1000년 동안 변한 게 없었다. 부처를 섬기든 그렇지 않든 중생들의 가슴과 삶 속에는 부처의 말씀 한 마디가 늘 함께 자리했던 것이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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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에 있는 부인당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노파 점쟁이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왕건은 대업을 이룬 뒤 노파에게 ‘조영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을 하사했다고 한다.     장길문 기자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에 있는 부인당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노파 점쟁이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왕건은 대업을 이룬 뒤 노파에게 ‘조영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을 하사했다고 한다.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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