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7) 소중한 문화재들(上)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영화로웠던 역사만큼이나 소중한 문화재가 많다. 폐사된 지 수 백 년이 흘렀지만 국보에서 지방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이 전한다.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보다 많은 문화재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개태사의 문화재는 역사 연구에 기준이나 표준이 된다. 왕건이 후백제를 멸한 936년에 명을 내려 4년 뒤인 940년에 완공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개태사는 조선초 폐사된 뒤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보배로운 건축과 문화재가 쇠락일로를 걸었다. 기둥과 서까래는 썩어 흙이 되었고, 지붕의 기와는 깨지고 부숴져 돌과 함께 뒤섞였다. 주춧돌과 장대석(長大石)은 농가의 담이 되고 논두렁을 쌓는 잡돌로 쓰였다. 허나 부처의 인연은 끝이 없어 돌고 돌아 논과 밭에 다시 도량이 들어섰다. 인연의 실마리가 이어져 1930년대 김광영 보살이 옛터에서 불신(佛身)을 수습하여 찌든 먼지를 닦고 길에 뒹굴고 논바닥에 처박힌 조각들을 모아 도량을 열었다. 1000년 넘게 올연히 서있는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거대하고 투박하다. 모두 거대한 화강암을 운반하여 다듬은 불상이다.

맨 가운데 서 있는 본존상의 높이는 4.15m, 왼쪽의 좌협시보살은 3.53m, 오른쪽 우협시보살은 3.46m이다. 협시보살은 본존불을 보좌하는 불상이다. 본존불은 신장이 4.15m로 장육존상에 가깝다.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불상 뒤에는 광배(光背)가 있었는데 이것까지 고려하면 1장 6척에 가깝다. 육계(肉계)는 낮고 나발(螺髮)은 수 백 년 비바람에 노출됐던 탓으로 거의 마멸됐다. 육계는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으로 부처가 가진 32개 길상(吉相) 중의 하나다. 나발은 작은 곱슬머리 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을 말한다.

얼굴은 대체로 이마 부분이 넓고 턱 쪽은 좁은 역삼각형 구조다. 이마가 좁고 상대적으로 눈매와 눈은 매우 길고 두툼하다.

왼손은 배에 대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 모습을 띠고 있다. 시무외인은 말 그대로 부처가 중생에게 무외(無畏 두려움이 없음)를 베풀어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손 모양은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위로 뻗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형태이다. 시무외인과 짝을 이루는 게 여원인(與願印)인데 여원인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아래를 향한 모습이다.

개태사 본존불의 경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지만 왼손은 아래를 향하지 않고 배에 대고 있는 특이한 사례다.

좌협시보살은 1988년 정비작업을 하던 도중 땅 속에서 머리 부분이 발견돼 몸체와 이어 붙였다. 그런 탓으로 두부의 보전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얼굴은 대체로 등근 편이지만 좌우보다 위 아래가 좀 더 길다. 코도 길고 뚜렷하며 얼굴 전체가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띠었다. 3개의 불상 중 솜씨가 가장 빼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협시보살도 본존불이나 좌협시보살과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얼굴은 원형에 가깝고, 위 아래 걸친 옷의 표현이 한결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개태사 삼존불은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마치 원통형의 돌 기둥을 세운 것처럼 괴체감(塊體感)을 느끼게 한다. 괴체의 `괴(塊)`는 `덩어리`라는 뜻이다. 유난히 큰 귀와 손발, 밋밋한 옷자락 등은 통일신라 때의 불상과 거리가 있다. 기존의 불상들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원만하고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데 비해 개태사 불상은 당당하고 강건하고 투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전쟁을 통해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위풍당당한 무인상을 보는 듯하다. 대형 불상을 좌상이 아닌 서 있는 자세로 만든 것도 의미 있다.

육중하고 투박하고 강한 장수 모습의 불상은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개태사 삼존불은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계는 "고려왕실의 위용을 나타내는 고려 초기의 기념비적인 불상" "통일신라 미술과 구분되는 고려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 "후삼국 조각양식을 마무리하고 통일 고려의 불상양식을 수립한 최초시기(936-940년)의 석조로 된 걸작품"이라 평한다.

개태사 오층석탑도 고려초 석탑을 대표한다.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원래 개태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46년 현재의 개태사로 옮겼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절터의 불당 앞에 위치했던 것이다. 탑의 높이는 4.69m, 폭 1.8m이며 기단은 대부분 유실됐고, 현재 탑신부와 상륜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를 대표하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흐름을 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개태사 옛터에서 수습된 석조공양보살상도 귀중한 문화재다.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금은 개태사지 인근 용화사라는 암자에 모셔져 있다. 높이는 110cm로 오층석탑 앞에 놓여 있던 불상이다.

원래 머리가 떨어져 나가 현재의 두부는 새로 제작하여 붙인 것이다. 당초 불전지 앞에 탑이 있고 그 탑 앞에 배치됐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무엇을 바치거나 고백하는 자세로 돼있다. 비로자나불의 법신인 석탑 앞에서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다리는 세운 채 공양하고 있다. 개태사 공양상은 조성 시기는 광종 5년(954년)-11년(960년)으로 추정한다. 태조 왕건이 죽은 뒤 광종이 진전을 세울 때 탑과 공양상을 함께 조성했다는 것이다.

석조(石槽)도 개태사의 옛영화를 짐작케 하는 문화재다. 충남도문화재자료 275호로 2개가 남아있다. 석조는 돌을 넓고 깊게 파서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돌로 만든 큰 그릇이다. 물을 담아 저장하기도 하고, 큰 일을 치를 때 먹거리나 기물을 씻는데 사용했다. 크기는 가로 305cm, 세로 133cm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오랜 세월 토출된 탓으로 마모가 심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제법 잘 간직하고 있다. 1개는 발굴하여 전모가 땅 위로 드러나 있고 1개는 땅 속에 묻혀있다. 김재근 논설위원

①삼존석불=보물 219호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고려 초기 불상을 대표한다. 큰 키에 투박하고 육중하고 강건한 무인의 모습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새 왕조의 의욕적인 분위기를 잘 담고 있다.

②공양상=개태사 옛터에서 수습된 공양보살상은 부처의 법신인 탑 앞에서 공양을 올리기 위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던 것이다.

③수조=수조(水槽)는 물을 담기 위해 돌을 다듬어 만든 큰 물통으로 사찰에서 물을 저장하거나, 먹거리·기물·그릇 등을 씻는데 사용했다.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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