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10) 성쇠와 흥망의 기록들(下)

 매월당 김시습은 1459년 그의 시에서
매월당 김시습은 1459년 그의 시에서 "절은 황량하고 궁전(진전) 문은 열렸다"며 개태사의 황폐함을 노래했다.
조선조 개태사 관련 기록은 고려 때와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고려 왕실의 도움 아래 화려함을 자랑하고 위세를 떨쳤던 모습은 사라지고 쇠락한 모습과 기이한 사건에 등장한다. 유학자들은 개태사를 비판적으로 노래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46년이 지난 1438년 뜬금 없이 연산현청을 개태사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다. 조정이라는 관리의 발언인데 앞 뒤 설명이 없어 왜 개태사에 현청을 세우려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게 세조 5년(1459년) 좌의정 강맹경이 관련된 사건이다. 당시 좌의정이던 강맹경에게 덕성이라는 중이 찾아와 천명이 내렸다며 역모를 제의한 것이다. 강맹경은 즉시 이를 나라에 알렸고 덕성 일당은 국문을 당한 뒤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조선초 개태사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공맹과 주자의 이념으로 무장한 조선은 불교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사찰 토지를 몰수했다. 줄줄이 사찰을 폐쇄하고 백성들의 출가를 막았다. 여승들을 끌어다 노비나 첩으로 삼았으며 사찰에 침입, 기물을 부수고, 보물을 훔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개태사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459년 김시습의 시에도 개태사가 등장한다.

절은 황량하고 궁전 문은 열렸는데

황혼 들자 박쥐만 어지러이 날아오네.(중략)

부숴진 비석은 일찍이 몇 번이나 바람과 우레를 맞았던가.

단청은 다 떨어져 향불에 잠겼으니 <매월당시집>(김기 역)

김시습이 `저물어 개태사에 투숙하다`라는 시로 15세기 중반 개태사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절은 황량하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은 열려있다. 비석은 부서졌고 단청도 떨어져 나갔다. 부서진 비석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고려 때 삼존석불을 조성한 것은 틀림없지만 비석은 이 시에 처음 등장한다.

점필재 김종직도 1468년 `개태사로 가는 도중에`라는 시를 남긴다.

절은 폐해지고 교목만 남았는데

푸르고 푸른 덩굴풀이 새롭구려 <한국고전종합 DB>

김종직은 개태사가 폐해지고 교목만 남았다고 읊었다. 스님 몇 명이 살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폐허지경이라 이런 표현을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직은 왕명을 받아 호남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연산 객사에서 숙박했다. 고려조 때는 승려나 관리들이 개태사에 묵는 일이 많았지만 조선조에 이르러 그런 기능이 사라진 것이다.

성현(1439-1504년)의 문집에도 `개태사`라는 시가 실렸다.

과객은 길을 묻고자 섬돌에 오르고

스님은 가사를 기우며 맑은 창에 앉았네. (중략)

우습구나, 태조 왕건이 허수아비를 만든 일이여!

그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정녕 분잡을 떨었던가.

<허백당 시집>(김기 역)

성현은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불상을 만든 일을 비판한다. 그는 스님이 가사를 기우고 있는 데 유적지가 텅 비었다고 적었다. 우중충하게 건물이 서있고 소수의 승려가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개태사의 퇴락은 오랜 세월 차츰차츰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의 대시인 눌재 박상(1474-1530년)도 개태사를 담은 시를 지었다. <눌재선생집>에 `황산 개태사의 무쇠절구`라는 시가 실렸다. 그는 이 시에서 엄청난 크기의 솥이 진흙모래가 쌓인 채 방치되고 있다고 적었다.

귤옥 윤광계(1559-1619년)의 시 `개태사를 지나며`에도 개태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남아 있다.

전 왕조의 개태사

빈 터만 거친 산 곁에 남았네.

돌부처님은 허리가 반쯤 꺾였고

대겁(大劫) 중에서 삼천년을 넘겼네.

<귤옥졸고> (김기 역)

윤광계는 개태사가 빈터만 남아있다며 석승(石僧)의 허리가 반쯤 잘렸다고 전한다. 석승은 물론 개태사 삼존석불을 가리킨다. 940년 낙성식을 가진 석불이 이 무렵 훼손된 것이다.

개태사는 1589년 기이한 사건으로 세간에 오르내린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은봉 안방준(1573-1654년)의 문집 <은봉전서>에 이런 시가 전한다.

남국을 두루 유람하는 나그네

계룡산에 이르러 눈이 번쩍 밝아졌네.

뛰는 말이 채찍을 보고 놀라는 형세요

굽이치는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네.

가득히 아름다운 기운 쌓였고

빽빽이 상서로운 구름 피어나네.

무(戊)와 기(己) 양년에 형통한 운세 열리니

태평시절 이룸이 어찌 어려우랴. (김기 역)

정여립이 자신이 왕이 된다는 시를 허물어져가는 개태사 벽에 써놓았다는 것이다. 정여립(1546-1589년)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인물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순탄하게 출세의 길을 걷다가 낙향했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역모죄로 몰리자 자살했다. 그의 행위는 조선 최대의 문신 학살사건인 기축옥사를 불렀다. 정씨가 집권한다는 도참설은 조선 초부터 이미 떠돌던 얘기로 정여립이 이러한 참설에 자신을 묶어 퍼뜨렸을 가능성은 작다. 역모를 도모하는 사람이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얘기다.

서예가이자 시인, 화가인 설정 조문수(1590-1647년)도 개태사 쇠솥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만고에 누가 이것이 신령한 물건인 줄 알까

이미 우레와 비를 부른 후에 다시 맑게도 하는구나. <설정시집> (김기 역)

개태사 무쇠솥을 신령스런 물건으로 묘사한다. 우레와 비를 부르고 날씨가 맑게 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어 개태사와 연산 일원에 대해 빼어난 작품을 남긴 문인이 등장한다. 담정 김려(1766-1821)가 주인공이다.

영웅의 공적 호산에 떨쳤지만

성스럽던 빈 절터 옛모습 사라졌네

다만 당시의 단단한 쇠솥이 있어

행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백 번 돌아보네

여기서 `영웅`은 태조 왕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려는 성스럽던 대가람이 폐사되고 무쇠솥만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음을 전해준다. 쇠솥이 밭 가운데 있다는 표현으로 보아 금당이나 진전, 강원 건물은 모두 사라진 듯하다. 이 시는 불우했던 천재시인 김려가 연산현감으로 일할 때 쓴 `황성리곡` 204편 중의 하나다. `황성리곡`은 `사유악부`와 더불어 조선조의 빼어난 시로 손꼽힌다.

개태사는 조선조의 도도한 배불 정책에 밀려 서서히 쇠퇴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1459년 `절은 황량하고 궁전 문은 열렸다`고 적었고, 점필재 김종직은 1468년 `절은 폐해지고 교목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귤옥 윤광계는 돌부처(삼존석불)의 허리가 반쯤 꺾여있다고 전했다. 고려의 진전사찰이 그 기능을 접고 승려 한 두 명이 거주하며 명맥만 유지하다 결국 금당과 진전마저 무너져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자(儒者)들이 고려조 대가람을 보는 시각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호화롭고 번잡했다며 부처를 모신 것을 비판했다. 강맹경과 정여립 모반사건에 개태사가 등장했고, 백성들은 가뭄이 들면 개태사 쇠솥에 비를 빌었다. 고려조 빛나던 왕실사찰 개태사가 조선조의 거센 배불정책에 밀려 가람의 기능을 잃고 참설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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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필재 김종직은 '개태사로 가는 도중에' 라는 시에서
점필재 김종직은 '개태사로 가는 도중에' 라는 시에서 "절은 황폐해지고 교목만 남았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조선조 문인이자 화가, 명필인 조문수도 개태사 쇠솥을 보고 시를 지었다. 보물 1669호 조문수의 필적 위심재수서(爲沈秀才書).        사진=문화재청
조선조 문인이자 화가, 명필인 조문수도 개태사 쇠솥을 보고 시를 지었다. 보물 1669호 조문수의 필적 위심재수서(爲沈秀才書).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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