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2) 황산에 대가람 세운 까닭은?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견훤릉. 비운의 영걸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뒤 화병으로 죽어 후백제의 왕도 완산주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혔다. 장길문 기자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견훤릉. 비운의 영걸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뒤 화병으로 죽어 후백제의 왕도 완산주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혔다. 장길문 기자
고려 태조 왕건이 대가람을 세운 황산(黃山)은 어떤 곳이고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왜 후대의 왕들이 이곳에 왕건의 얼굴을 그린 진영(眞影)을 안치하여 국찰(國刹)로 삼고 특별하게 대우했을까? 황산은 백제가 두 번이나 숨을 거둔 운명의 땅이다. 600년 7월 백제의 영웅 계백이 이곳에서 죽었고, 그로부터 276년이 지난 936년 후백제 2대 왕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도 여기다.

◇신검군 황산행의 미스터리=신검의 군대가 왕도인 완산주(전주)가 아닌 황산으로 도망한 것은 미스터리다.

신검이 북쪽의 황산으로 후퇴한 배경으로 두 개의 가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에 후백제의 군사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고려군과 후백제의 실질적인 최후 전투는 완산주와 동떨어진 경북 일리천(선산)에서 벌어졌다.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태자 무(武)와 일부 군대를 천안에 남겨두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예비대일 수도 있고, 왕건의 본진에 호응하여 양쪽에서 왕도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일 수도 있다. 후백제도 천안의 고려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 군사를 길목인 황산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검은 일리천에서 패하자 황산으로 후퇴하여 이들 군사와 합세하고 전력을 재편성, 싸우려했다. 그러나 일리천 패배로 너무 많은 병력을 잃고 사기도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전대 김갑동 교수는 대담한 의견을 내놓았다.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그 원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박영규는 장인인 견훤이 신검의 반역 때문에 왕건에게 망명하자 왕건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고려가 만약 의로운 군대를 보내면 제가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영접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왕건의 군대가 완산주로 오면 여기에 호응하여 내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왕건군과 신검군이 일리천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할 때 박영규가 완산주 일대를 장악하자 신검이 할 수 없이 황산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탄령, 황산 불사는 어디인가=왕건과 신검의 황산 전투와 관련 탄령(炭嶺)과 황산, 황산의 불사(佛舍)`가 어딘지 주목을 끌고 있다. 탄령은 순 우리말로 `숯고개`로 숯가마가 있던 곳을 의미한다. 660년 신라의 5만 군사가 넘었던 탄현(炭峴)과 동일한 고개라는 게 학계의 견해다. 학계는 대전의 동구와 충북 옥천의 경계인 식장산 고개, 전북 완주군 운주면의 탄현, 금산군 진산의 탄치(炭峙) 등 신라에서 사비에 이르는 여러 곳을 거론하고 있다.

황산은 대체로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의견이 모아진다.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 통일신라 때 황산군으로, 고려 때 연산군으로 바뀌었다. 황산이 바로 황산벌이고 현재의 연산면 천호·연산·표정·관동·송정·신양리 일대 넓은 구릉과 들판이라는 것이다.

견훤이 화병으로 등창이 나 숨을 거둔 `황산의 불사` 위치는 천호산 자락의 개태사와 고운사를 지목한다. 그러나 고운사는 천호산 줄기 황령재 넘어 벌곡면 양산리에 소재한다. 병이 난 견훤이 굳이 큰 고개를 넘어 산골짜기 고운사로 갔을 가능성은 낮다. 김갑동 교수와 공주대 윤용혁 교수 등은 고려말 최해가 편저한 `동인지문사륙( 東人之文四六)`의 내용 등을 들어 황산의 불사가 개태사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나오는 `一新寶刹`(일신보찰)을 "옛절을 새로 크게 지었다"고 해석하여 기존의 가람을 전면 개축 또는 증축했다고 보는 것이다. 왕건이 황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고, 견훤은 그 곳의 절에서 죽었으며, 왕건이 승리를 기념하여 옛절을 고쳐 개태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부처에 감사… 견훤 흔적도 지우고=왕건이 황산에 사찰을 세운 것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개태사 조성의 배경과 의미가 잘 남아있다.

첫 번째는 백제를 정복하고 통일을 이룬 기쁨을 담고 있다.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生民)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고 한 다짐을 실천했다고 천명했다.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는 전승기념 사찰인 것이다.

두 번째로 부처와 천지신명에 대한 감사이다.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官司)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나이다"라며 통일이 부처와 산신의 도움 때문이라고 밝혔다.

고려의 힘을 과시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의도도 엿보인다. 왕건은 후백제 정복을 하늘의 보살핌 덕분이라 하여 산의 이름을 `천호`라 하고 태평성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가람의 이름을 `개태`라고 지었다.

불상을 엄청나게 크게 조성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삼존불상은 본존상의 높이가 4.15m, 좌협시보살 3.53m, 우협시보살은 3.46m에 이르며 매우 위압적인 분위기다. 마치 고려의 힘과 위세를 자랑하는 듯하다.

후백제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의미도 담겨있다. 황산은 대대로 백제인이 살아온 백제의 땅이었다. 여기서 후백제 2대왕 신검의 항복을 받고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순간 그 옆에는 숙적 견훤이 수하의 장수로서 함께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찼겠는가!

대도량 개태사 창건은 견훤을 지우고 신검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였다. 황산은 계백이 마지막 싸움을 벌였고, 후백제 창업주 견훤이 비운을 끌어안고 죽은, 백제의 혼이 스며있는 땅이었다. 왕건은 큰 절을 세우고 산의 이름까지 바꿔 `고려`라는 씨앗을 뿌리기로 결단을 내렸다. 황산에 어른거리는 백제의 그림자를 지우고 그 위에 강하고 힘차고 희망찬 신생 고려의 힘을 과시했다.

개태사 창건은 고려 창업주 왕건 삶의 정점이요, 승리의 찬가고 환희의 춤이었다. 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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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은 660년 계백장군 5000 결사대가 장렬하게 산화한 곳이고 936년 후백제 2대왕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에 대가람 개태사를 세워 부처와 산신의 도움에 감사하는 한편 백제의 흔적도 지우려 했다. 장길문 기자
황산은 660년 계백장군 5000 결사대가 장렬하게 산화한 곳이고 936년 후백제 2대왕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에 대가람 개태사를 세워 부처와 산신의 도움에 감사하는 한편 백제의 흔적도 지우려 했다.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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