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문화재 중 백미는 역시 고려청자라 할 수 있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도 청자의 색깔을 ‘비색(翡色)’이라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 청자의 생산지는 전북의 부안, 전남의 해남과 강진 등지였다. 그러나 최대 생산지는 전남 강진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청자는 개경으로 운반되어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운반은 주로 해로를 이용하였다.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개경으로 운반하는 해로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청자 운반선은 때때로 침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태안 앞바다 안흥량(安興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내 부소산성은 1400여 년 전, 도성의 비원으로 사용됐다. 왕궁에서는 침략을 대비한 최후의 방어용 성곽이기도 했다.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으로 불린 이곳은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백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에 달한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 산성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으로 쌓은 복합 산성이다. 부소산성 주변에는 다시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의 보조 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성흥산성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의 군수품 창고 터 등이 남아 있으며, 그
귀얄 붓에 백토를 묻혀 회청색 태토의 병 표면을 하얗게 칠한 뒤 그 위에 산화철 안료로 모란 무늬를 그린 이 ‘분청사기철화모란문병’(粉靑沙器鐵畵牡丹甁)은 충남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탕의 백토와 무늬의 산화철 안료가 대비되면서 무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분청사기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생산된 분청사기의 하나로 그 생산지는 현재 전남 고흥 운대리와 충남 공주 학봉리 두 곳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특히 계룡산 기슭에 분포하고 있는 공주 반포면 학봉리
고려 제7대 임금인 현종(顯宗 ·1009-1031) 대에 와서 충남 지역은 다시 중요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현종은 성종 11년(992) 경종비였던 헌정왕후 황보씨와 태조의 아들 안종 욱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사수현(경남 사천)으로 귀양을 가 보모에게서 자랐다. 그러나 이를 불쌍히 여긴 성종의 배려로 성종 12년(993)에 사수현에 내려가 아버지 안종 욱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종 15년(995) 안종 욱이 사수현에서 죽자 그 이듬해 개경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약 4년간 사수현에
-금동널꾸미개-부여 능산리고분군 출토금동으로 만든 널장식. 금동널꾸미개는 처음 능산리 고분군의 관대 위에서 목관 파편과 함께 발견됐기 때문에 목관을 장식하는 꾸미개 중 하나 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왕의 관의 좀 더 기품있게 만듦과 동시에 관의 몸체와 뚜껑을 고정시키는 도구로도 사용돼기도 했다. 아래쪽 가까이에 원형의 구멍이 뚫린 장방형 판이 있고, 그 윗부분에 산모양과 심엽형(식물의 속잎꼴)을 투각한 장식이 달려 있다. 산 모양과 심엽형 장식은 금도금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쪽과 바깥쪽 끝부분에는 가늘게 음각선이 장
말탄사람 그림 토기병-국립공주박물관-서산시 운산면 출토무사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백제 토기병.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Ⅰ-13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병(甁)의 어깨부분에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백제는 고구려 벽화고분과 같이 백제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회화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들을 이용하여 당시 생활상의 일부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그림을 통해 직접 보는 것에는 비할 수는 없다. 백제의 회화자료는 송산리 6호분과
금동봉황장식(金銅鳳凰裝飾)-부여 부소산성 출토 -국립부여박물관 소장봉황은 봉과 황의 합성어로 봉은 수컷을, 황은 암컷을 이른다. 상상 속 영원불멸의 새로 일컬어지는 봉황은 오색 깃털을 지나고 다섯가지 음을 낸다고 전해진다. 깨끗한 이슬만 먹으면서 평화로운 세상을 노래하며 살기 때문에 태평성세를 이루는 나라에만 나타난다고 한다. 또 봉황은 살아있는 생물은 먹지 않는다고 보면서 불교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영물로 여기기도 한다. 때문에 사찰에서는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대웅보전 처마 밑에 봉황을 장식한다. 동아시아의 박산을 포함해 상상의 세
상자모양벽돌(箱子形塼) -부여 군수리절터 출토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정확한 명칭은 전해지지 않은 백제시대의 부여 군수리 절터. 지난 1935년 대대적인 조사결과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 형식인 중문과 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으로 이루어진 절이었음이 밝혀졌다. 또 목탑자리 심초석 아래에서 다양한 국보급 유물이 세상의 빛을 봤다. 보물 제329호로 지정된 납석제여래좌상을 비롯해 납 석제불좌상(보물 제330호), 한쪽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른 지두무늬 암키와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백제는 건국 후 3세기 중엽 고이왕(234∼286)대에 이르러 영토 확장과 더불어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낙랑군, 대방군을 북으로 밀어내면서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앙에 6좌평제를 실시해 업무를 분담했다. 관등을 16품으로 나누고 공복(公服)을 제정해 관리들의 질서 체계를 확립하였다. 후에 고이왕을 백제의 시조처럼 기술한 것도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백제가 최전성기를 누린 것은 근초고왕(346-375) 때였다. 그는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장악했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 7국도 병합했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
치미국립부여박물관 소장‘망새’라고도 불리는 치미는 전통 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조형물을 말한다. 치미는 그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의 깃털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으로 건물의 최상부인 지붕에 하늘을 나는 듯 날개 짓하는 치미를 둠으로써 힘찬 기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건물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해 황룡사나 미륵사 등 대형 사찰 등 큰 건물에만 사용돼 출토예가 극히 드물다. 치미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화재와 같은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동진(東晉·317-420) 시대
청동기 시대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의식의 차이에 따라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청동제 무기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경쟁에 의해 지배와 피지배, 빈부의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힘 있는 자는 군장이 되었고 우세한 부족이 주변의 부족을 정복해 나갔다. 우세한 부족의 군장은 정복한 부족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중 몇 명에게 권력을 위임하였고 이들은 정치기구를 만들어 피지배 부족을 통치했다. 피지배 부족의 반발을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검은간토기는 백제 토기를 대표적인 기종의 하나로, 몸통이 긴 항아리(長卵形壺), 어깨 부분에 각이진 항아리(有肩壺) 등과 함께 백제토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토기이다. 토기의 표면을 곱게 갈아내어 검은색 광택이 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운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800℃이상의 온도로 한번 굽고, 이것에 생솔잎이나 왕겨, 짚 등을 덮어 씌워 검은 그을음을 입힌 뒤 전체적으로 잘 갈아 광택을 만들고 표면을 뾰족한 도구로 긁어 무늬를 새겼다. 일반적인 백제 토기가 가마에서 한번만 구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대략 기원전 2,000~1,500년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500년 경에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시작된 요녕(遼寧) 지역 청동기 문화의 유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제품은 대개 철기와 동시에 출토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초기 철기 시대와 겹치는 것이 사실이다. 청동기는 석기보다 날카롭고 여러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만드
목간이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木片)으로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불린다. 나무를 폭 약 3㎝, 길이 약 20-50㎝, 두께 3㎜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묵서(墨書)했다. 원래는 대를 갈라서 한장 한장 끈으로 꿰어 사용했지만, 훗날 목편으로 바뀌어 종이가 발명될 때까지 썼다. 한국의 낙랑 채협총(樂浪彩塚)에서도 출토됐는데, 이들 목간에는 ‘논어’(論語)의 단편도 있고 군대의 조직·우편제도·교통 및 여러 가지 물품의 이름을 기입한 것도 있어서 그 방면의 연
기원 전 8000년 내지 7000년 경부터 지구상의 기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지구의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빙하기가 없어져 현재와 비슷한 기후 상태가 되었다. 인간의 두뇌도 조금씩 발전하여 돌을 깨서 쓰는 단계에서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드는 단계로 변화하였다. 돌을 가는 데는 깨는 것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었지만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쓰는 데에도 훨씬 용이하였다. 또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쓰는 토기가 제작되었다. 이를 ‘신석기 시대’ 또 ‘간석기 시대’라 한다. ‘간석기 시대’는 돌을 갈아서 사용한 시대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
이 문화재는 1986년 청양군 목면 본의리 2구 동막 부락의 진입로 공사에서 가마가 파손되면서 문화재 조각이 발견되어 박물관에 신고되었다. 신고 당시 문화재는 150여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어 불상받침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문화재의 원형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복원을 시도하였으나 크고 무거워 실패하였고 결국은 종이로 된 축소모형을 만들어 복원해 보고, 이것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도움을 받아 1990년 드디어 문화재의 원형(原形)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는 바로 흙을 구워 만든 거대한 불상받침이었다. 이 거대
①공주 석장리와 구석기인류의 출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고릴라나 침팬지, 오랑우탄에서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들과는 다른 존재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과학이 발달한 현재에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600만년 전 또는 400만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를 우리는 구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돌의 일부분을 떼어 내 주먹 도끼, 주먹 자르개, 돌날 등을 만들어 썼기 때문에 우리 말로 ‘뗀석기 시대’라고도 한다. 당시 인류는 이미 두 발로 서서 걷게
백제금동대향로, 무령왕릉 출토 국보급 유물 등 충청지역 대표문화재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하지만 국립부여박물관과 공주박물관 전시실과 수장고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이 안됐거나 그만큼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숨겨진 유물이 무궁무진하다. 두 박물관의 추천을 받아 백제인의 숨결이 녹아있고, 장인정신이 오롯이 담긴 총 40선의 유물을 소개한다.1. 호자(虎子)부여 군수리 출토국립부여박물관 소장지난 1979년 3월 부여 군수리나성 서문터(西門址)에서 출토된 호자(虎子)는 호랑이의 모습을 한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얼굴 부위에는 둥그렇게 구
‘충남의 모든 문화를 한눈에 살핀다’본격적인 ‘백제전문박물관’으로의 비상을 꿈꾸는 국립공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30일 상설전시실을 개편해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을 선보였다.지난 2004년 재개관 당시 ‘무령왕릉실’과 ‘웅진백제문화실’로 구성된 상설전시실은 한정된 시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충남의 선사·고대·중세의 역사와 문화를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통사적 전시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전시실 내 문화콘텐츠를 대폭 개선한 것. 또 이번 상설전시실 개편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07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지방국립
‘문화재 속 다양한 모습의 호랑이를 찾아 보세요’경인년(庚寅年)을 맞아 국립청주박물관이 다음달 2일부터 2월 28일까지 ‘생활 속의 호랑이’라는 주제로 박물관 상성전시실 입구로비에서 특별전을 개최한다.이번 전시회에는 사슴을 사냥하는 호랑이가 그려진 ‘호랑이 사슴무늬 기와’를 비롯해 호랑이가 인명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한 내용이 있는‘음성현감고문서’, 익살스런 호랑이 모양의 뚜껑을 가진 ‘향로’, 호랑이를 주제로 그린 민화 4점 등 총 11점이 전시된다. 또 ‘호랑이 족자 달력 만들기,’ ‘호랑이 모양 탁본하기’, ‘까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