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악기들은 완함(阮咸), 거문고, 장소(長簫), 북, 배소(排簫 ) 등이 있다. 이러한 백제악기들은 1993년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에서 다섯 사람이 연주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이 5종의 백제악기 중에서 완함, 거문고, 장소는 모두가 연대적으로 앞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므로 고구려에서 백제로 전래된 악기로 추정된다.5종의 백제악기 이외에 비파(琵琶)가 비암사(碑巖寺)의 석상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완함은 백제사회에서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고
왕흥사지를 비롯한 백제문화유적지 주변의 금강 준설 사업은 대부분 국토해양부가 벌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15일 ‘4대강 문화재 훼손, 문화재청장의 발표에 대한 반박문’이란 글을 통해 “최근 충남도 금강특위가 금강 준설에 대한 중단을 정부에 요청하자 국토부가 마치 도가 추진하는 수상무대가 주범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그는 이날 반박문에서 ‘4대강 사업으로 문화재 훼손이 없다’는 이건무 문화재청장의 최근 발표에 대해 모두 6가지 항목으로 나눠 조목조목 반대 논리를 폈다.반박문에 따
백제는 뛰어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마한 지역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과 고구려의 발달된 금속공예기술을 받아들이며 수준높은 미의식과 찬란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도특한 금속공예문화를 이루었다. 백제의 금속공예는 그동안 웅진시기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을 중심으로 알려져 왔으나,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 최고의 걸작인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면서 화려하게 꽃핀 사비시기 금속공예문화가 존재하였음을 알려주었다. 백제의 금속공예는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세련된 조형감각을 꽃피웠으며, 사비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부여에서 출토된 청동 유물
무령왕릉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장신구를 비롯해 구슬, 거울, 동제그릇, 중국제 도자기 등 모두 108종 46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 중 중국제 도자기는 웅진기 수입 중국도자를 대표한다. 출토된 자기는 모두 9점으로 청자 육이호 2점, 흑유 사이병 1점, 자기잔 6점이다. 이들 자기는 당시 양조(梁朝)에서 유행하던 것들로서 중국에서 4세기 경부터 나타난 연판문 장식 등이 나타나고 있다. 525년 능에 안장된 무령왕의 묘에서 중국 양나라 자기가 출토된 사실은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조선 역시 왕조 초기에는 왕위 계승이 순탄치 않았다. 태종(太宗)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태종의 후계자도 장자가 되지 못하고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세종(世宗)이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문종(文宗)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은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살의 세자가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곧 비운의 단종(端宗)이었다. 생전에 문종은 대신 황보인․김종서 등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한국이 신청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ng)’에 대한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 등재를 확정했다고 1일 밝혔다.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두 곳이 등재됨으로써 한국은 10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유네스코는 지난달 31일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회의에서 회의 의장을 맡은 주카 페헤이라 브라질 문
27. 이성계의 계룡산 천도 문제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정국의 혼란과 더불어 천도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서북쪽의 해안가에 위치해 외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논의에 그치고 실행에는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다 역성 혁명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사 한번 천도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계룡산으로의 천도가 시도되었다.과전법 체제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바 있던 이성계는 1392년 7월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의흥친군위(
백제 세발토기 -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세발토기는 백제토기를 대표하는 기종이다. 납작한 접시에 3개의 다리를 부착해 안정감을 주었다. 세발토기는 한성시기에 출현해 사비시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은 물론 고분부장용, 제사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시기가 내려갈수록 접시의 깊이가 얕아지고 다리가 접시바닥의 가장자리에 붙는 특징을 갖는다.청동제(靑銅製)의 것을 포함해 삼족기(三足器)라고도 한다. 서아시아, 중국,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 선사(先史) 내지 원사(原史)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상호의 관련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아시아
-공주 송산리 고분군 출토-국립공주박물관 소장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제13호로 웅진동과 금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백제의 왕족과 귀족의 무덤터다. 이 무덤 터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됐기 때문에 ‘무령왕릉’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송산리고분군에서 현재 확인되고 있는 무덤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이 있고, 이 외에 돌을 이용해 쌓은 굴식돌방무덤인 1-5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의 배치는 구릉의 윗부분에 1-4호분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그 남쪽에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또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있다. 송산리 고분에
14세기 후반 고려의 학자 문익점에게서 시작됐다는 한국 면직 역사가 무려 800년이나 앞당겨졌다.국립부여박물관은 최근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유물 기획 전시을 위해 유물을 정리 분석하는 과정에서 1999년 능산리 절터 제6차 조사 때 수습한 직물(폭 2㎝, 길이 약 12㎝)이 백제시대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부여박물관이 한국전통문화학교 심연옥·정용재 교수팀과 함께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종단면을 관찰한 결과 면 섬유의 특징이 뚜렷이 관찰됐다. 이 직물이 목화에서 실을 뽑아 직조됐음이 증명된 것이다.그간 국내 면직물
백제시대에는 불상 외에도 다양한 조각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남아 있는 조각상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인간 군상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진흙 소조상들은 백제 미술의 뛰어난 가치를 보여준다.부여 구아리유적에서 발견된 진흙 소조인물상은 찌푸린 듯한 표정과 움푹 들어간 눈가의 주름, 살짝 웃는 듯한 입 모양 등으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보여주는 나한상(羅漢像·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성자)이다. 광대뼈와 골격이 또렷해 그 표정이 확연히 살아있다. 나한의 얼굴에 서린 고뇌의 빛깔은 수도자의 처연한 아픔을 극명하게 표현해 낸
대전·충남 지역에는 현재 많은 사원이 분포하고 있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듯이 마곡사와 갑사는 유명한 절이다. 이 외에도 예산의 수덕사, 부여 무량사와 같은 이름 있는 사원들이 있다. 창건한 지가 오래 된 고찰들이지만 각 시대의 주요 인물들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갑사는 통일신라 시대 의상이 창건한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유명하며 무량사는 생육신의 하나였던 김시습이 머물다 죽은 인연이 있다. 또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일본군을 피해 승려가 되어 숨어 있던 곳이며 수덕사는 유학파 신여성인 일엽 스님과 화가 나혜
-대통사지 출토 ‘대통(大通)’새김 기와조각 -국립공주박물관 소장‘대통大通’이라는 글을 새긴 기와조각이 공주시 대통사터에서 출토됐다. 이 문화재는 기와의 표면(瓦面)을 요형凹形으로 1단 낮게 원형으로 형성하고 그 안에 지름 1.5cm 크기의 글자를 상하로 배치한 것. 이 대통새김 기와조각은 매우 고졸한 자체와 신중한 운필로 되어 있어 무령왕릉출토 묘지석과 함께 웅진시기 백제 서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와조각은 미세한 태토에 견고하게 소성되었고, 색조는 회흑색이다. ‘대통’새김 기와조각은 최대 폭이 6.5cm, 길이 4.1.
백제 귀족의 집단무덤 중 하나로 꼽히는 부여 능사리 능안골고분군은 주변에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과 청마산성(사적 제34호) 등 역사적인 유적지가 밀집돼있다. 당시 높은 금속 기술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에, 더구나 귀족들의 집단 무덤이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된 것은 자명한 사실. 당시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됐다.이곳은 1994년 12월 부여공설운동장 건립을 위해 도로공사를 하던 중 백제고분이 노출돼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최영과 홍산대첩 고려는 그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왜구(倭寇)란 말은 원래 ‘왜(倭)가 노략질하다(寇)’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는 명사로 굳어져 고려말기에 노략질하던 왜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실제 ‘고려사’에는 왜구와 함께 ‘왜적(倭賊)’ ‘왜노(倭奴)’ ‘해적(海賊)’ ‘해도(海盜)’ 등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침입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충정왕 2년(1350)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즉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해에 “왜구가 고성(
-공주 송산리 출토-국립공주박물관 소장바닥이 편평하지 않고 둥든 항아리가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게 놓일 수 있도록 받치는 토기인 그릇받침(器臺). 백제를 비롯해 삼국 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많이 나오며 굽구멍이 뚫려 있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됐다.실용적인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릇을 고정시키는 것뿐 아니라 그릇을 보다 돋보이게 했다. 다양한 형태의 그릇받침이 존재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화로모양이나 바리모양, 원통모양, 고리모양 등으로 구분된다. 백제 그릇받침은 백제토기 중에서 비교적 대형에 속하며, 다른
굴뚝 꼭대기에 꾸밈으로 얹은 기와 지붕 모양의 물건, 연가(煙家). 조선시대 가옥이나 천녀고찰 등에서 주로 찾을 수 있는 연가는 각양각색의 매력을 뽐낸다. 진흙과 전돌을 켜켜이 올려붙여 그 위에 앙증맞은 축소형 기와집 지붕모양을 얌전히 올려놓는게 기본. 여기에 궁궐의 연가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일반 가옥의 그것은 소박하지만 기와 곡선의 자연스러움을 지닌다.연가는 주로 점토를 집 모양으로 작게 구워 만든 토기(土器)를 말한다. 이 토기는 일종의 장식토기로서 조금 약하게 번조되어진 연질토기이며 양반집과 궁궐, 사찰 등에서 굴뚝
고려는 최우 집권기인 고종 18년(1231) 몽고의 대규모 침입을 맞게 되었다. 최우 정권은 이듬해인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몽고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충남 지역에서도 공주나 아산, 온양 지역에서 몽고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고 여러 측면에서 몽고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충남 지역이 다시 한번 큰 전장으로 변한 것은 충렬왕 17년(1291)년부터 다음해인 충렬왕 18년(1291)의 일이었다. 원의 합단(哈丹) 무리가 침략한
부여 능산리사지는 곧 백제금동대향로로 직결된다. 지난 1992년 추운 겨울,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극적으로 발견되면서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500여 년을 고이 잠들어 있다가 세상의 빛을 본 대향로는 그놀라운 아름다움과 섬세한 공예기술 덕분에 학계는 물론 모든 이의 뇌리에 각인됐다. 때문에 능산리사지의 다른 유물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이곳에서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장장 16년 동안 수 백 여점의 국보급 유물이 출토됐다.국립부여박물관은 능산리사지의 발굴 성과를 집대성한 특별전인 ‘백
-대전 비래동 출토-국립공주박물관 소장비파형동검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송리형토기와 함께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유물로 알려져 있다. 기원지가 중국 요령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출토량도 많아 요령식동검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 동검은 한반도 중서부지역인 대전 비래동 지석묘, 부여 송국리 석관묘 등에서 드물게 출토된 바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의 형태를 이루며, 검몸의 중앙부에 돌기부가 형성되어 있다. 검몸과 검손잡이를 따로 주조하여 결합한 다음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