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장구한 대한민국 역사 속에 남아있는 유적 유물 가운데 유독 백제 유적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지 못했다는 본보 보도(1월11일,12일,13일,14일,20일,21일,24일,25일,26일,27일31일,2월8일,9일자) 이후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가 지난 8일 문화재청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목록에 선정되는 결실을 맺었다.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는 앞으로 2-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걸쳐 본격적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경쟁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이번 우선 등재 선정은
공주·부역역사유적지구처럼 소멸한 왕조의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는 더러 있다. 인도 함피유적(1986년), 베트남 후에(1993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구 시가지(1979년)가 대표적이다.특히 인도 함피유적은 수도 기능과 함께 번영했던 역사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주·부여유적의 유력한 비교대상이다.함피는 6세기부터 힌두왕조의 성지였다. 1336년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수도로 인구 50만의 대도시였고, 1565년 무슬림에 정복되기 전까지 면화, 향신료 무역으로 번성했다. 도시 곳곳에 남은 남인도 드라비다양식의 사
공주·부여 역사유적은 찬란한 백제 역사 만큼 값지고 가치있다. 백제시대의 성곽과 사찰, 고분, 유물 등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노력은 이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유적, 유물은 세계적으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받았다. 고인돌 유적과 경주역사유적지구, 고구려고분군, 고려 팔만대장경, 조선 종묘·안동 하회 및 경주 양동마을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유독 백제 역사유적지만 빠진 건 인정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와 신라 유적들은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이 됐을까.세계
무령왕릉이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건 지난 1994년이다. 이후 백제사와 동북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만큼 세계유산에 등재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왜 안됐을까? 지난 2006년 발표된 ICOMOS 한국위원회의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정비 보고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했다. 무령왕릉은 한국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가치가 탁월한 것은 사실이나 세계유산의 보편적 가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왕릉이 아닌 공주박물관에 전시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일원의 백제 유적지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려면 필요 충분 조건이 있다.먼저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를 인정받아야 한다. 유네스코는 오랜 시간 동안 또는 세계의 어떤 문화지역 안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 설계의 발전에 관한 인간적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도 필요하다. 또 인류 역사의 중
공주와 부여는 각각 웅진-사비시대로 이어지는 백제의 수도다. 당연히 고대 백제인의 삶과 죽음, 사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이 즐비하다.공주는 공산성과 옥녀봉 산성, 송산리 고분군, 정지산 유적, 수촌리 고분군, 고마나루 등 웅진백제의 궤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국 고고학 사상 엄청난 국보와 보물을 쏟아낸 무령왕릉은 웅진백제를 마감하는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부여는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사비백제 시대를 연 곳이다.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고분군, 청마산성, 구드레, 왕흥사지 등이 백제 후기의 찬란한 위상을 보여준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돼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적들이다.우리나라는 현재 석굴암과 불국사(1995), 종묘(1995),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전(1995), 수원 화성(1997), 창덕궁(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2000), 조선왕릉(2009), 하회와 양동 역사마을(2010) 등 모두 9개의 유산이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라있다. 여기에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이 지난 2004년에 등재됐다.선사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은 있지만 유독 백제유적지는 단 한 곳도
우연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은 위대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고고학 발굴사에서 뼈아픈 실수로 기록된다. 기록이 몇 남아있지 않은 백제사를 풀어줄 실타리였음에도 발굴이 채 하루도 안 걸렸다는 ‘졸속 발굴 논란’으로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쉬움을 더한다.매끄럽지 못한 발굴 과정은 많은 논쟁 거리를 낳았다. 당장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된 처녀분인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발굴 당시 부장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처녀분이 아닐 것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학계는 지진에 따른 봉분 내부의 흔들림이 원인이라지만 석수의 다리가
무령왕릉(武寧王陵) 발굴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고분 가운데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역사적 가치를 지녀왔다. 더구나 백제고분이 대부분 일제 등의 도굴 피해를 입은 가운데 온전하게 원형을 갖춰 발견된 것은 천우신조다. 대전일보사는 창간 61주년을 기념해 집중기획으로 ‘무령왕릉과 백제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시리즈를 연재한다.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통해 백제 역사 문화 연구의 어제와 오늘을 점검하고, 백제문화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좌표와 발전 방향을 탐색한
국립공주박물관은 대백제전이 열리는 기간인 오는 18일부터 내달 17일까지 ‘백제의 관(冠)’ 기획특별전을 연다고 16일 밝혔다.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백제의 관을 대표했던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국보 295호)과 익산 입점리 출토 금동관을 비롯해 공주 수촌리 유적, 서산 부적리 유적, 함평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 등 새롭게 발견된 백제의 관들이 선보인다.또 익산 미륵사지, 부여 염창리·능산리·하황리, 논산 육곡리, 나주 복암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은제 관장식이 무령왕릉 출토 금제 관장식(국보 154호)과 함께 전시된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유리조각이 1400년 전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지역 고분 등에서 로마양식 유리그릇이 출토된 적은 있지만 백제 지역에서 수입유리가 확인되기는 처음이다.국립부여박물관은 지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한 유리 조각에 대한 정밀조사 및 성분 분석을 실시한 결과 당시 외국에서 수입된 서방계 유리그릇으로 추정된다고 15일 밝혔다.이것은 6세기 중엽 백제 수도 부여에서 교역으로 들여온 유리잔을 사용했다는 증거로, 당시 대외교류의 한 면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크게 두 분류로 나뉘는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에 따라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국가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다.지난 2004년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중국은 최근 이 곳을 중국의 첫 고고유적공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중일 정도로 관심이 크다.고고유적공원은 유적지 보호와 전시, 역사 교육 및 연구, 관광 등을 아우르는 중국의 대규모 문화재 보호 프로젝트로 중국 정부는 오는 2015년까지 중국 전역에 30개의 유적공원을 조성할 방침이다.현재 중국 정부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 오호분묘 등 집안내 고구려유적을 ‘AAAA 국
아침일찍 단동을 출발해 광할한 옥수수밭을 거쳐 버스로 5시간 여동안 달려온 끝에 길림성 집안시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방문단은 우선 북한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식당 주차장 한 켠으로 허름한 돌담길이 눈에 들어왔다.주차장 옆 저층 아파트단지를 지탱해주는 석축역할의 돌담길인듯 싶었다. 하지만 아파트 신축시 석축으로 쌓았다고 보기엔 너무 오래돼 보였고 군데군데 끊어진 부분이 있었지만 아파트단지가 끝난 부분까지 돌담이 이어졌다. 국내성 성벽이다.북한 만포시와 압록강을 마주한 집안. 지금은 인구 25만명의 크지않은 도시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충남 서천 소재 ‘봉선리유적(舒川 鳳仙里遺跡. 사적 473호)’ 주변 2800여㎡를 문화재구역으로 추가지정 예고했다고 1일 밝혔다.서천군 시초면 봉선리에 위치한 봉선리유적은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중 확인돼 지난 2003년부터 1년여 간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부터 마한과 백제,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돼 당시 사회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됐다.특히 백제시기 무덤에서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 環頭大刀)과 금동귀고리 등 중요 유물이 많이 출토돼 2006년 1
문화재청은 충남 서천군에 위치한 사적 제473호 ‘서천 봉선리유적(舒川 鳳仙里遺跡)’ 주변 3필지 (2833㎡)를 문화재구역으로 추가지정 예고했다고 1일 밝혔다. 서천 봉선리유적은 서천-공주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중 확인돼 2003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마한·백제·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구들이 발견됐다. 특히 백제시기 무덤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귀걸이 등 중요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6년 11월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봉선리 유적 주변 역사공원
백제의 금동불은 현재 25㎝ 이하의 작은 불상들이 전해진다. 소형금동불이나 판불(板佛)은 휴대가 용이해서 승려들이 가지고 다니며 불법을 전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백제에서 소형금동불 뿐 아니라 대형금동불도 함께 제작되어 법당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금동대불의 광배(光背)로 추정되는 부여 능사리 출토 금동광배편은 그 좋은 예이다. 백제불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6세기 초 중앙에 주불이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둔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양식이 유행했으며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정지원’명 삼존불
조선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붕당이라는 폐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학문의 완숙도는 점점 깊어져 갔다. 이 시기에 조선 유학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학자가 우리 고장에서 나왔으니 그가 곧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선생이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옛터민속박물관(관장 김재용·대전 동구 하소동)은 23일부터 한달 간 ‘조선 여인, 나빌레라’전(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옛터민속박물관이 ‘2010 대충청방문의 해’를 맞아 마련한 특별 기획전시로, 2007년부터 지속해오고 있는 노리개전, 장도전 등 조선시대 장신구 전시의 일환이다. 신체 부위에 따라 달리 착용했던 장신구 중 머리를 꾸몄던 장신구만 모아 소개한다. 여성의 머리장신구 떨잠, 뒤꽂이, 비녀, 첩지 등과 남성 머리장신구인 갓, 갓끈, 동곳 그리고 각종 쓰개류인 다리, 족두리, 조바위, 풍차, 남바위, 도투락댕기 등이
지역 명문가에서 가보로 전해내려오고 있던 유물을 시민들을 위해 기증·기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동양 최고의 전서(篆書) 대가로 알려진 허목의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과 조선시대 대전의 실경을 그린 그림 ‘무수동도(無愁洞圖)’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선사박물관은 현존하는 희귀본 척주동해비문과 무수동도를 비롯, 대전 및 호서지역 명문가인 안동권씨 유회당가 유물 1666점과 은진송씨 추파공파 유물 60점, 고흥류씨 근대서적 405점을 기증받아 17일 기탁식을 가졌다.지난 4월 21일 안동권씨 유회당가에서 기탁받은 유물 속에 포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내부적인 혼란에 휩싸이게 됐다. 연산군대부터 시작된 4대 사화(士禍)로 정국은 어수선했다. 또 선조 초년부터 시작된 동·서 분당의 당쟁으로 지배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급변해 가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명나라와의 사대관계에 의지한 채 정쟁과 권력싸움으로 일관하던 중 일본의 침입을 맞았다.당시 일본은 16세기 전반기에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이 서로 할거하는 전국(戰國)시대가 연출되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