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초기 벌어진 춘천지구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는 '춘천대첩'으로 불린다.춘천대첩을 기념하는 공간은 춘천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의암호 인근에 1978년 조성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이다.기념관 입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년도순시 시 국가안보의식, 향토방위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을 지시했고 친필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의 명판으로 써 주심으로 동년 11월 28일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
허준구(사진) 춘천학연구소장은 춘천대첩의 지휘소가 있던 봉의산(鳳儀山)을 "강원도를 넘어 국가 위기와 평화의 역사가 담긴 공간"으로 평가했다.상서로운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모습이란 의미의 봉의산은 고려시대부터 춘천의 진산이었다. 1888년 고종 부부의 피난처로 춘천 이궁이 건립됐던 곳이고, 일제 시대 때는 신사(神社)가 있었으며 현재는 강원도청이 있다.허 소장은 "봉의산 중턱에는 '봉의산 순의비'가 있는데, 1253년 몽골이 침입 했을 때 도망가지 않고 '봉의산성'에 모여 한 명도 살아 남지 않을 정도로 결
철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던 대전은 교통과 물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6·25 전쟁 시 대전은 국토의 중심이면서 교통·물류 중심이었던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이승만 정권은 수도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 대전에 도착, 임시수도로 공표하기도 했다. 옛 충남도청(등록문화재18호)을 임시정부로 사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는 취지의 방송 녹음을 대전에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이다
6·25전쟁 당시 가장 격전지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의 전세를 뒤집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전투 가운데 가장 핵심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투다.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전투에 비유된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내가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 동맹군과 인민군 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000여명과 미군 1000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했다. 당시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불어닥친'예비검속' 광풍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 된 도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인제군 현리에서 6·25전쟁기 중 국군의 가장 큰 패배로 일컬어지는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9사단을 포함한 우리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와해되고 동부전선은 위기를 맞는다. 다음해인 1952년 10월초,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했던 우리 국군은 철원 서쪽의 이름없는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 때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은 9사단. 하지만 395 고지의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1950년 7월 19-20일 치러진 대전지구전투는 단 이틀 간의 전투였음에도 115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투입된 병력 중 1/3 수준으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대전전투는 6·25 전쟁 발발 후 대전지역에서 치른 최초의 방어전투였던 데다, 전쟁 초기 거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패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그럼에도 6·25 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 대전을 지나 남진을 계획했던 북한군을 며칠 동안 대전에 묶어두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여기저기서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대전을 지키겠다고 전우들이 힘을 합쳤죠. 결국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26일 대전시 동구보훈회관에서 만난 노병은 전투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7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눈가에 깊어진 주름처럼 기억마저 흐릿해질 법도 하건만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노병의 이름은 김용대.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세 살이 됐다.김 할아버지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입대해 1901036이라는 군번을 받았다. 때는 1950년, 미 제24사단과 북한
경기도 파주시 창동리 임진강 하구에서 동쪽을 향해 달려가면 일련 번호가 매겨진 팻말이 500-60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0001호'로 시작하는 팻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육지가 끝나고 바다를 만나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 달려간 뒤에야 '1292호'로 마침표를 찍는다. 남쪽을 향한 696개와 북쪽을 향한 596개의 녹슨 표지판은 이곳이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임을 알려준다.남과 북은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재개될 지 모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