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보듬는 마음 나를 버리고 정의만 앞세운 매몰찬 세상 인간적인 참모습으로 타인을 바라봐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올 한해를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선포하였다. 희년(禧年)이란 고대 히브리 전통에서 50년마다 지내던 특별한 해로써, 모든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소유지를 돌려주며, 재산을 잃고 인격적 자유마저 상실한 가정들에 회생의 길을 열어주고 평등을 회복하게 되는, 말 그대로 기쁨의 해를 말한다. 이런 희년을 예외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라는 표어로 특별히 선포하였다. 즉 이번 특별희년의 본질은 하느님 자비를 통하여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자비! 세상을 향해 막연히 사랑한다는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구약성경 안에서 나타나는 헤세드(hesed)와 라하밈(raha mim)이라는 용어를 통해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헤세드란 몸에 배어있는 선한 태도로 단지 사랑이 넘치는 친절한 돌봄만이 아니라 철저히 상대방을 도와주는 모습에서 비롯된다. 서로 상대방이 잘되기 바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면의 허심(許心)과 신의(信義)를 나타냄으로써, 도의적 성격을 넘어 법률적인 계약으로서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리고 그 조건을 존중하지 않을 때 하느님 편에서도 그 법률상의 이행의무가 소실되지만, 이 지점에 오면 헤세드는 법률상의 엄격함이 아닌 본래의 의미로, 거저 베푸는 사랑, 배반보다 훨씬 강력한 사랑, 죄보다 훨씬 강한 은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헤세드)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출애 34,6-7)

헤세드가 `자기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남성적인 의미가 있다면, 라하밈(raha mim)은 그 어근으로 보더라도 레험(rehem-어머니의 태, 자궁) 곧 `어머니의 사랑`을 가리킨다. 어머니와 태아를 맺어주는 깊고도 본연적인 끈에서부터 그 아이에게 온 마음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특별한 관계와 사랑을 말한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모성의 힘으로부터 솟아나는 이 성실하고도 굽힐 줄 모르는 사랑은 악과 부딪칠 때, 특별히 당신 백성과 개개인의 죄와 부딪칠 때 `자비(라하밈)`로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칙서인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자비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안에서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세상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각박한 세상의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마음이 무뎌지고 모질어져 극심한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그렇게 메말라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지 않았던가? 이웃을 외면할수록 점점 더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이렇게 마음이 모질어진 이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복수를 하지 않고 자비를 선택함으로써,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죄인들을 용서하셨으며, 살인자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사랑을 선물하셨다. 자비가 충만히 베풀어지는 것은 모질고 냉혹한 마음을 만날 때이다. 자비만이, 얼핏 무기력해 보이는 자비만이 돌처럼 딱딱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녹일 수 있다.

그 자비를 내면의 깊은 곳에서 만날 때 부부사이는 물론 가족 간, 이웃과의 관계는 한참 물이 오른 새파란 나뭇잎처럼 생동감이 차고 넘칠 것이다. 사랑, 또 다른 이름의 자비와 용서는 자아를 실현하거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선(bonum diffusivum sui)을 함께 나누는 인간적인 사랑이다. 그렇기에 먼 훗날에 가능한 사랑이 아닌 오늘 해야 할 사랑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매몰찬 정의만을 앞세운 엄격한 심판자로서의 모습이 아닌 그 정의를 사랑으로 껴안은 자비로움이 내 얼굴에 조금이나마 묻어나 있는지를….

최상순 천주교 대전교구 가정사목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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