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꽤 많은 분들로부터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고 보니 나처럼 하찮은 존재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가져 주시는 분들이 계시구나 하는 생각에 참으로 감사했다. 그중에도 “현실이 어렵더라도 힘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는 매우 값진 선물이었다. 외로운 이민생활 속에서도 서로 따스한 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아름답다.

선물이라면 대개 와인 한 병 정도가 무난하지만 각별한 사이일 경우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성의를 표시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인사표시’는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엔 마음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성직자에게 드리는 영적(靈的) 선물이 아닌 바에야 외형표시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용부담이 만만찮은 것도 사실이다.

두 달여 전 옆집에 이사 온 칠레 출신의 신혼부부는 우리 집 문 앞에 성탄카드가 담긴 작은 초콜릿 박스를 놓고 갔다. 평소엔 서로가 바빠 인사조차 건넬 기회가 적었는데 막상 선물을 받으니 더없이 친근감이 들었다. 20대 후반의 그들은 노부모와 살고 있다. 나와 아내는 답례로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그들의 모국 특산품인 칠레 산(産) 와인이 무난할 것 같아 카드와 함께 건넸다. 이를 받아 든 70대의 노모는 무척 좋아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외모가 선해 보이는 그분은 영어는 못했지만 감사의 표정이 절절히 배어났다.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N선배님은 올해도 예외 없이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오셨다. 선배님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데 8년여째 나를 챙기고 계신다. 한때는 80대의 늙으신 어머니가 떡을 만들어 신문사 직원들 먹이라고 들고 오신 적도 있다. 그 노모가 지금은 기력이 쇠하셔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계시는 모습이 짠하다. 이민사회에서 이런 순수함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지난해 가장 기억에 남을 선물은 B형님의 것이다. 이 형님은 우리와 교류한 적은 얼마 안 되지만 자상한 보살핌으로 우리 집안의 ‘수호신’ 역할을 해 주시고 있다. 1년여 전 집 앞에 웬 큼지막한 꽃 항아리가 놓여 있어 놀랐는데 알고 보니 이 형님이 놓고 가신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우리 집 앞뜰의 몰골을 보고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조경기술이 뛰어나신 이 형님은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집에 들러 아무 조건 없이 앞뒤 뜰을 관리해 주셨으며 그 덕분에 우리 집 값을 확(?) 올려놓으셨다.

우리는 처음엔 그 형님이 꽃가게를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집에 갖다 놓으시는 꽃다발들이 사실은 형님 스스로 재료를 사다가 손수 만든 것임을 알고는 너무도 놀랐다. 실제 꽃가게는 여동생이 운영하고 있으며 형님이 종종 가게에 들러 도와주고 계셨던 것이다. 꽃가게를 하시는 그 여동생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분들 덕에 우리 집안 곳곳엔 꽃향기가 가득 들어차게 됐다. 다행히 아내도 온갖 정성을 쏟아 꽃을 관리하는 덕분에 꽤 오래가는 편이다.

연말을 앞두고 나와 아내는 고민에 빠졌다. 이 형님 부부께 대체 무엇을 선물해야 하는가. 한 열흘을 고민하다 겨우 내린 결론은 우리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자는 뜻에서 장갑을 사 드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포근해 보이는 장갑을 사서 살짝 형님댁 문 앞에 두고 왔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받고는 못 견디는 형님께서는 이를 두 배로 되돌려 주셨다. 큼지막한 ‘슬로 쿠커’(slow cooker)를 놓고 가신 것이다. 아내는 이를 보고 “우리가 뭘 해 드렸다고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감동했다.

세상 뜨신 성당 신자들의 호상(護喪)을 도맡아 처리하는 등 평소 궂은일을 마다 않으시는 이 형님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경외심을 느낀다. 많이 가졌다고 베푸는 것이 아님을 그분을 통해 실감한다.

그런가 하면, 충남대 간호학과 출신의 여류시인 M여사는 예쁜 카드와 함께 포근한 목도리를 보내 주셨다. 어찌 이분들뿐이겠는가. 외로운 인생길에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소중하게 느껴진 한 해였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삶은 아름답고 살 만한 것이다. 평소 베풀지도 못하고 살아가는데 신께서는 나에게 웬 이런 복을 주시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난 한 해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희망과 행운이 가득한 새해가 되실 것을 기원한다.

흰 구름 뜨고/ 바람 부는/ 맑은 겨울 찬 하늘/ 그 무한(無限)을 우러러보며/ 서 있는/ 대지의 나무들처럼/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가득하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영원한 일월(日月)의/ 회전(回轉) 속에서/ 너와 나, 우리는/ 약속된 여로(旅路)를 동행하는/ 유한한 생명./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더욱더/ 가까이 이어져라.(조병화 ‘신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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