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무대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인간의 집단적 원한은 종종 충격적이었던 과거의 기억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는 너무도 갈등이 중첩적이고 뿌리가 깊다. 어떤 윤리적 잘못과 그 잘못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 일으키는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감정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세대 간 갈등에서 성별 갈등까지 증폭되기만 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갈등을 활용한 탓이다. 지금까지의 관습상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윤리의 영역으로 추방되어 있던 용서라는 개념이 과거의 갈등으로 인해 서로 고통받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에 도달해야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처럼 우리가 "사회적이 된다는 것은 곧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현대사의 그물망에서 상대의 가치와 이해의 상호성에 초점을 맞춘 윤리의 정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정치란 인간들이 서로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를 실행해 옮기는 기술이다. 적대감과 적이라는 존재는 미래에도 인간의 무대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모두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정치란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다르지만 우호적인 시민관계로부터 추방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공통된 이해를 가진 이웃들과 함께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고 또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가장 정치적인 기관의 하나인 국회에서 지도자들이 만약 인내를 가지고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하는 예술을 실행에 옮긴다면 여의도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 정치적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대선판이 분노와 증오로 점점 뜨거워진다. 일전불퇴의 한판 크게 싸움을 벌일 것이다. 정치란 정적을 이기기 위해 권력을 축조하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정치에서 용서를 말하는 것은 곧 모순어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권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지뢰 위에 놓인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두 가지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용서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약속과 계약을 맺는 능력이다. 용서는 도덕적 판단으로 가득 차 있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용서의 목표는 증오가 낳는 분노를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용서는 그것과 쌍둥이인 회개(悔改)가 결여되면 정치적인 인간은 오직 조상들의 범죄를 반복하기 위해서만 역사를 기억한다. 정치적 맥락에서 용서란 파편화된 인간관계를 보수하기 위한 윤리적 진리와 관용, 감정이입과 헌신을 결합하는 하나의 실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거짓말을 예사로이 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르노니 전과 4범 후보도 용서하라. 기표소 안에서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라. 김종호 호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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