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며칠 전 대한민국 5공화국의 독재자가 죽었다. 같은 날 5·18 유공자 한 명의 시신도 차가운 저수지에서 떠올랐다. 한 사람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천수를 누렸고, 한 사람은 매 순간 고통스럽게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승려로서 원망 대신 용서의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용서는 천수를 누리다 죽은 그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다. 바로 아직도 내심 `전두환 때가 살기 좋았다`고 하는 우리들이다.

윤리학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우리가 얼마나 벤담 식 공리주의로 통용되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벤담은 그 당시 노예제도나 사형제 폐지, 여성 투표권이나 동성애자 차별 금지 등을 주장했으며, 영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법률 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 진보적인 철학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오늘날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그의 공리주의는 자본주의 논리를 윤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고 있다. 이론의 역사적 맥락은 사라지고 자본주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공리주의는 자본주의를 뼛속 깊이 신봉하는 대한민국에서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다.

그의 이론을 1980년으로 가져가 보자. 거리의 부랑자들이 군 출신의 형제복지원 원장 손에 넘겨지면서, 서울의 시민 대다수는 깨끗한 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5월 광주의 폭도들을 진압하니, 나라에 질서가 세워져, 국민 모두가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조직폭력배들이 삼청교육대로 보내지니,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가 되었고, 국민들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통금도 해제되었고, 3S도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고, 나라도 부강해졌다. 대다수의 행복은 몇 사람의 불행을 상쇄하고도 남으니, 국가 전체의 행복은 최대가 된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전체에서 공리가 증진되었으니 그때가 좋았던 게 아닌가!

벤담이 웃을 노릇이다. 21년도에 번역된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벤담이 도덕을 무시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벤담의 철학이 `배부른 돼지들의 철학`으로 치부되고 있는 가운데, 이 책은 벤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벤담은 영국의 불합리한 판례법 주의를 비판하면서 보편적 성문법을 위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입법의 원리로서 공리를 으뜸에 둔 것이었다고 한다. 사익이 공익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고 할 때에도, 권력자가 과도하게 이익을 가져가서 공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때, 그 사익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한되는 것은 힘없는 소수의 인권이 아니라 권력자의 무절제한 탐욕이다.

왜 대한민국은 힘없는 소수의 인권이 이렇게 하찮은가! 왜 대한민국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제한하면 큰일이 날 듯 야단법석인가! 그때가 좋았다고 하는 추론에는 한쪽의 벤담만 있고 다른 벤담은 없다. 이익만 있고 도덕은 없다. 생때같은 목숨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통용되는 한,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다.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만 발전시키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독재자가 다시 등장하고, 이제는 안전한 줄 알았던 당신 차례가 될 것이다. 이제는 당신이 물속으로 들어갈 차례고, 이제는 당신이 차별받고 고문당하고 죽을 차례다. 무섭지 않은가!

`그때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힘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 빼고`라고 말하는 것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 판단은 전체로서 하는 것이지 그것만 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한들, 힘없는 누군가를 희생 시켜 얻은 결과는 절대로 정당할 수 없다. 이제는 제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런 몰지각한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편히 잠드소서!

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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