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겸손은 미덕이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는 봉사를 하거나 기부금을 낸 뒤, "제가 즐거워서 한 겁니다", "덕분에 제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의 미덕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교육현장에서 길러진 요즘의 우리들에게는 심리적 이기주의로 해석된다. 심리적 이기주의에 따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모든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 심리적 기제를 유전자 차원에서 옹호하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대한민국 청소년의 필독서가 될 정도다. 개인의 포괄적 적합도를 올려주는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생존전략은 과학서로 뒷받침돼 우리사회의 지배 신화가 됐다.

한편 인간에게 이타적 본성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화론자들의 노력도 있었다. `타인에게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엘리엇 소버와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의 `Unto Others`가 그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이기적 욕구뿐 아니라 궁극적인 이타적 욕구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타적 욕구란 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의 안녕 자체가 목적인 욕구를 말한다. 이 책은 이타적 개체가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성공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난이도나 대중화 실패 때문인지 혹은 이타주의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독후감 작성 지도를 받으러 온 적은 없다. "그 아이가 너무 안됐잖아요", "누구든 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라고 말하면 위선자나 몽상가로 의심받는다.

물론 본성이든 유전자든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다고 해서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며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오류다. 따라서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거나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자연주의적 오류다. 그럼에도 이타주의 이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편향된 신화에서 벗어나 인간적 삶의 프레임을 균형 있게 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의 포괄적 적합도만이 아니라 타인의 안녕 자체를 생각하는 고양된 인간들이 사는 사회,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위해서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했지만, 실제로 난민을 인정한 비율은 매우 낮다. 2018년 제주도의 예맨 난민 정책에 대한 법무장관 청와대 청원 답변에 따르면, 그 당시까지 26년 동안 심사가 끝난 사람 중 4%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그 후 예멘은 무사증 입국 불허 국가가 됐다. 최근 아프간 난민 390여 명이 들어왔지만, 정부는 난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특별 기여자라 칭하고 이를 위한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난민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과 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인재뿐 아니라 자연재해로 인한 기후난민도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됐다. 1951년에 유엔난민기구에 가입한 한국은 6·25 전쟁 이후 유엔한국재건단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받았으니 우리도 도움을 줘야 한다. 받은 대로 갚는(Tit for Tat) 전략은 진화적으로도 성공적인 전략이다.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이 3년 뒤 GDP가 올라갔다고 하면서 난민 허용이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하는 언론도 있다. 이익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안녕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대한민국은 이제 여러 면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위상에 맞는 국제적 책임도 져야 한다. 내 이익만 생각하는 천박한 문화에서 함께 살아가는 고상한 문화로의 이행은 난민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 변화와 정부의 적극적 제도 마련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박정희 대전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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