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교폭력 미투로 시끌
가해자 일벌백계 재발 예방
아니면 말고식 폭로 경계를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고전 속 호랑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민화나 문학 속에서의 모습은 어딘가 모자라고 어리숙한 표정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보다 곶감을 더 무서워해 울음을 그친 아기 때문에 당황하기도 하고, 꾀 많은 토끼에게 호되게 골탕을 당해 그림자만 봐도 줄행랑을 치며, 떡 하나만 줘도 목숨을 구제해주던 마음씨 좋은 호랑이는 익살과 해학의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처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은 호랑이라면서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렀고, 한반도의 모습을 호랑이로 형상화해 놓기까지 했다. 단군신화부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친근한 동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돼 한민족의 숨결을 함께 공유한 동물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역사에 등장하는 호랑이라면 체감온도가 달라진다.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 두려운 존재로 관계가 바뀌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호랑이의 기록은 900회를 넘는데, 대부분은 인간에게 해악한 호환(虎患)의 대상으로 서술돼 있다. 목장에 들어가 가축들을 잡아가고, 민가에 내려와 사람을 해치며, 심지어는 궁궐까지 쳐들어와 선을 넘는(?) 녀석이 되고 말았다. `제 말 하면 오는` 호랑이라서 입 밖에 내기조차 무서운 맹수(猛獸)로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조선 후기 유행한 콜레라에 호랑이가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준다는 의미의 호열자(虎列刺)라는 이름까지 붙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포획하면 벼슬과 상금을 내려 출세를 보장해 준 이유가 있었다. 중국 속담에 `일 년의 반은 조선 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가 조선 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폭력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타인에게 신체적·정신적 해를 끼치는 폭력의 가해자는 당연히 일벌백계해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어릴 때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해도 절대로 처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용서와 관용이라는 잘못된 미덕이 관행처럼 이어진 결과이므로, 이번 기회에 더욱 강한 처벌로 본을 보여야 할 필요도 있다. 재발 예방은 확실한 결단과 용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던 호랑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회적 이슈를 악용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가며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 사람의 입이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나게 할 수 있고, 열 사람의 힘이면 방망이도 구부러지게 할 수가 있으며, 뭇사람이 떠들어 대면 날개가 없어도 날 수가 있다"고 했는데, `삼인(三人)`의 여론만 모이면 거짓이 참과 진실로 둔갑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아니면 말고` 식의 안이한 행동에 당하는 희생양들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끝없이 호랑이를 번식시키는 이들에겐 더욱 강력한 처벌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고 호랑이는 우리 입속에 산다. SNS의 발달은 말의 힘을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만들어놓고 말았다. 손가락 몇 번 두드리면 거짓과 위선이 참말과 진실로 변하는 마술 같은 세상이 됐다. 몇 사람이 무리[黨]를 지어[作] 작당(作黨)만 하면 호랑이는 실체도 드러내지 않고 항시 우리 주변에서 `호시탐탐(虎視眈眈)` 매섭게 노려볼 것이다. 틈만 보이면 언제든지 공격할 기세로 말이다. 보이지 않으니 잡을 수도 없다. 조선의 특수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불러온다 해도 포획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끝내 혜왕의 의혹을 벗지 못한 방공의 억울함의 저주인 듯 호랑이는 우리 인간들에 의해 지금도 만들어진다. 확실한 것은 문학과 현실 속 호랑이보다 입속에 사는 호랑이가 훨씬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