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곤 프랑스문화원장
전창곤 프랑스문화원장
사회활동을 하다 보니 가끔 타기관의 직원채용 면접심사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대부분의 공기관의 경우, 이제는 그 기관의 핵심요원들 뿐만 아니라 그 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다양한 직종(안내, 경비, 청소미화, 요리 등등...)이 속칭 블라인드채용의 대상이 된다. `블라인드 채용`이라함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중의 하나로 지목되어왔던 정실인사, 쉽게 말하면 `빽`이 통하는 인사채용의 관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자는 충정에서 나왔으리라 짐작한다. 공정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이제는 지원자의 이름과 수험번호, 그리고 간단한 약력 외에는 채용분야에 대한 이들의 적정함을 판단할 대단한 근거도 없이 단시간의 면접만으로 대부분 정년 65세가 보장되는 공무직들의 향방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몇 몇 아주 추상적 판단기준들이 제시되지만 대부분 단 10여 분의 질의응답에서, 면접위원들이 아주 용한 점쟁이가 아니라면 그 자리의 프로필에 걸맞은 지원자를 선정하는 것은 요행의 차원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매번 앞서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채용분야에 필요불가결한 전문성의 확인은 대부분 여러 가지의 차별금지 위반조항에 의해 소극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 자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하는 성(姓)적, 연령적 고려도 불법이다. 한번 채용되면 그 자리에 적합지 않은 사람이라도 정년이전에 퇴직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규정상으로는 임용 1년 후 평가 결과 해임이 가능하다지만 기나긴 행정소송을 각오하지 않고는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란다.

이전 세대의 불공정과 밀실행정이, 또 수많은 직종의 채용요강을 각기 달리할 수 없는 행정적 어려움이 이런 획일적 지침을 가능케 했으리라 내심 짐작은 해보지만, 이런 기계적 공정이 공기관이 담보하여야 할 최소한의 효율성을 밀쳐내는 듯한 느낌은 요즘 우리 사회의 전반적 흐름과 오버랩 되면서 암울하기만 하다.

나만의 생각일까? 최근 시민들이 감당하여야 할 책임은 방기한 채 권리만을 앞세우는 많은 시책들이 우리 사회를 점차 반동의 사회로 이끄는 듯한 느낌은 많은 사람에게 반동(反動)이라는 낱말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환기할 수 있음에도 이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대로 간다면 이 단어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또 미래를 잘 형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반동은 한자의 뜻에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듯이 "움직임"의 반대말일 뿐이다. 우리가 과도한 법조항에 매달려 모든 역동적인 시도를 포기하는 일부 공무원의 행태를 흔히 지칭했던 "복지부동"이란 말과 닮은꼴이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우리의 경제적 역동성이나 너도나도 가난했던 와중에도 항시 건재했던 이웃에 대한 염려와 배려, 학교나 가정에서의 각 구성원간의 존중과 상식적 규범들은 이제 희미한 옛이야기일 뿐이고, 이기적으로만 행동하게 양육된 우리의 젊은 세대들과 공정을 앞세워 너도 나도 고발하게 만드는 현금의 세태들도 우리 사회를 점차 반동의 사회로 몰아가는 듯하다. 코로나사태와 더불어, 밖에서는 `4차산업혁명`이나 `모빌리티의 중요성`등을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판에, 우리 사회의 전반에 퍼지는 이러한 경직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뿌리 깊은 우리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책으로 제시된 기회의 균등이 실제로는 기계적, 결과적 평등만으로 이해되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의 발전과 자아실현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점은, 이기심, 또는 생존본능을 저변으로 하는 인간심리의 기본을 고려한다면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익과 평등을 내세운 현 정권의 다양한 서민 친화적 정책들이 당장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집권세력의 중차대한 책무를 고려한다면 순간의 정치적 이해에 눈멀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선심성 정책들의 남발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할 뿐이다. 전창곤 프랑스문화원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