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더라도 새해를 계획 없이 시작할 수는 없다. 모두가 한번 쯤을 들어봤을 공자(孔子)의 말씀처럼 "일생의 계획은 어려서 세우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세우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워야 한다. 어릴 때 배우지 아니하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고, 봄철에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철에 바랄 것이 없고,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 할 일이 없다". 계획이 없으면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관건은 `어떤 계획을 세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고민도 병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결정한 계획은 자신의 역량에 대한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사회적 계획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흔히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진보와 보수, 중도의 집단구성 비율이 30: 30: 40이어야 한다고 일컫는다. 하지만 이의 이면에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새가 나려면 좌우의 날개가 모두 필요하다는 표현과 동일한 맥락이다. 가까운 과거에, 한 전임 대통령은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법으로 통제하려고 했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퇴보였다.
필자는 오래전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 머리말에 등장하는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는 구절이다. 지식이 있어야 사물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구절을 응용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자문자답의 형식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질문은 던지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지적 경각심에 둔감해 있는 것 같다. 사회나 본인과 다른 생각을 갖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잃고 스스로를 닫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데도 장애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양상으로 확대된다. 2019년 우리 사회가 `공명지조`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는 않는가?
호기심과 지적 경각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느 한 계획의 성취여부를 떠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1년 후 이맘때 쯤 우리는 다시 한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그때는 오늘처럼 계획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개인적 아쉬움으로부터, 무겁고 어두운 단어로 사회를 평가해야 하는 심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기를 기대한다. 박순우 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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