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식 한남대 교수
신윤식 한남대 교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립해양역사박물관에 가면 대형 범선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범선은 18세기에 건조된 암스테르담호인데, 네덜란드 번영의 역사를 상징한다. 네덜란드는 영국보다 앞선 17세기에 최고의 부국 대열에 올랐던 나라다. 네덜란드 성공의 주역은 바로 동인도회사인데, 여기에 참여한 상인들의 기업가정신은 창업을 준비하는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네덜란드의 성공은 동인도회사라는 모험 기업으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민간기업의 활약이 이토록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는 없다. 네덜란드는 본래 북해에서 청어잡이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후 어업에서 해상운송으로 영역을 확장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당시 네덜란드의 비즈니스모델은 역내 해상운송과 무역이었다. 즉, 포르투갈이 멀리 아시아에서 운반한 향신료를 리스본에서 유럽 내 국가로 유통하고 중개 무역함으로써 수익을 올리는 구조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1581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에스파냐의 국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스페인은 적대국인 네덜란드 상선의 리스본 기항은 물론 네덜란드 상인과의 거래를 전면 금지시킨다. 이로 인해 후추의 유럽 내 운송과 무역을 도맡았던 네덜란드 비즈니스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번성했던 암스테르담 거리에 잡초가 무성할 정도로 큰 경제 불황이 닥친 것이다.

졸지에 상품의 공급처를 잃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여기서 크게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그들은 포르투갈처럼 아시아로 직접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기존에는 유럽의 연안바다에서만 활동했는데 이제부터 인도에 가서 직접 후추를 사오겠다는 것이었다. 100년을 해운에 투자해 인도 및 아시아산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도 죽음을 무릅쓴 동방항해에 나서지 않았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상인들은 당대 최고의 상품인 후추와 향신료의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결심한다. 17세기 당시는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까지 뱃길로 다녀오는데 무려 2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항해도중 폭풍우와 질병으로 인해 죽을 확률이 더 높았던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회사를 설립하고 투자자를 모아 선박을 건조해 항해에 나선다. 1595년 4월, 4척의 상선이 암스테르담에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가는 대항해길에 올랐다. 장장 15개월의 항해 끝에 인도네시아의 반텐에 도착해 꿈에 그리던 후추를 싣고 1597년 8월 3척이 암스테르담 귀환에 성공한다. 왕복 2년 4개월이 걸렸고, 240명의 승무원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87명뿐이었다. 상처는 컸지만 대성공이었다. 이후 네덜란드 6개 도시의 무역회사가 하나로 합병해 1602년에 대규모의 무역회사가 탄생했다. 바로 동인도회사(VOC,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다.

동인도회사는 신생기업이었지만 100년 먼저 인도와 아시아에 진출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아성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기독교 포교로 인해 막부와 갈등을 일으키자 네덜란드는 기독교 전도 없는 순수한 무역에만 종사해 도쿠가와 정권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다. 히라도(平戶)에 지은 동인회사 창고에 표기된 서력식 연도표기를 문제 삼아 창고를 즉시 허물라 하자 군말 없이 이에 응한다. 무기와 일본인 용병의 수출을 금지하자 그들은 그것도 준수한다. 무역이익을 위해 고객이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 것이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일본의 유일한 무역파트너가 돼 200년을 존속한다.

창업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다. 특히 요즘같이 무한경쟁인 시대에서 고객을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남다른 각오와 자세를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보였던 이러한 모험정신과 자세를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새겨볼만 하다. 신윤식 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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